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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로 레이 x 샤아 아즈나블 재록본 수록 목록
아무로 레이 x 샤아 아즈나블 재록본 수록 목록
비밀 데이트 (1306) : 그리프스 항쟁 시절, 아무로 x 크와트로
의지 (130607)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결혼 (130612)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Cooking Cook Coop (130625) : CCA 이후 연방의 감시 아래 동거하는 둘.
32번째의 단어 (131120) : CCA 이후 연방을 피해 숨어서 사는 둘. 의사 카미유 등장.
Say cheese (140119) : CCA 이후. 살인 소재.
밤 (140121)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아무로와 시한부 샤아.
Kiss crevasse (140122) : CCA 즈음.
Please SOS (140125) : CCA 이후. 자살+살인 소재
You are not evil, not a devil, not a monster (140211)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Runaway, Don't go away, I'll catch you (140302)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Lost thing (141007) : CCA 이후. 자살 소재.
Let me in (141009)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죽은 별 (141208)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소리 방울 (141231) : CCA 이후 동거했던 둘. 사망 소재.
New year bride (150102)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Crush Rush baby (150102)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19↑
정체자 (150118)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BUBBLE BUBBLE (150217) : 그리프스 항쟁 시절. 아무로 x 크와트로.
Round Round day (150511)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우그러드는 밤 (150517)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아무로와 시한부 샤아.
꽃은 여전히 아름다울까 (150613) : CCA 이후, 아무로만 살아남았다는 설정.
섬세한 겨울 (150714) : CCA 이후 아무도 없는 콜로니에서 동거하는 둘.
EVER AD BALLOON (150826)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범죄 사이 (161003, 161108 / 上下편 구성) : AU. 살인청부업자 아무로와 사진작가 샤아.
Layday birth (161127)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콘돔과 남자와 남자 (1801~02)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아무로를 증오하는 샤아와 샤아를 사랑하는 아무로. 19↑
Think pink (1802~03)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자살 소재. 19↑
+일부 편에 대한 단상, 총후기, 들은 음악
짧은 편은 5p, 긴 편은 110p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3~14년도 글들은 대부분 5~10p 이내이며 15년도 글들은 20p 이내, 16년도 글들부터는 대부분 50p 이상입니다.
CCA 이후 스포일러가 대단히 많습니다. 총 630~640페이지 예상.
섬세한 겨울 윗쪽의 글들은 http://lastgravity.tistory.com/ ←여기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클릭하시면 새창으로 열립니다.
콘돔과 남자와 남자, Think pink, 넘어진 우주 샘플은 아래 따로 첨부합니다.
샤아는 섹스를 못한다.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적당히 분위기를 돋우는 법도 모르거니와 신음도 내지 않는다. 삽입하는 순간 살짝 허리를 들어주는 배려는 언감생심이다, 욕심도 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마냥 나무토막 같지는 않다, 따뜻할뿐더러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줄 줄은 안다. 키스할 때 입술을 벌려주기는 한다는 얘기다. 허나 리드하는 이에게 너무 많은 선택권을 넘겨준다. 섹스는 둘이 함께 하는 행위일진대 마치 넣는 쪽한테 모든 권한이 있다는 양 구니 좀처럼 흥이 나질 않는다. 저만 발정 난 짐승이 된 느낌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분명 한참 몸을 섞었을진대 영 한 것 같지가 않아 나 잠깐 담배 좀 피고 와도 되냐, 조용히 묻는다. 송골송골 맺힌 땀을 보건대 분명 하기는 했다. 샤아는 이미 눈을 감은 채다, 제 2차 네오지온 항쟁이 끝나고서 그는 무척 약해졌다. 더 이상 스페이스노이드를 일 필요가 없어져 그런지도 모른다. 반평생 연방을 지켜온 아무로조차도 샤아가 34년 간 매일같이 느꼈을 부담감은 짐작하지 못한다. 할 수도 없다, 왕자나 같은 지위였건만 어찌 안단 말인가. 아무리 많은 짐을 졌었대도 아무로는 어디까지나 군인이었다, 언제든 도망칠 수 있었다. 허나 샤아는 아니었다. 고귀한 혈통을 타고나 늘 최전선을 지켰다, 총탄이 날아드는 가운데서도 단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스페이스노이드를 지키라는 명을 받았으므로 몸 사릴 생각 따위는 하덜 않았다 했다. 샤아가 사랑하는 유일한 혈육이자 한때 아무로와 사랑을 나눈 세이라 마스는 그런 오라비를 마음 깊이 증오하면서도 꽤 동정했다. 기실 그러지 않기도 힘들었다, 스스로를 갈아 스페이스노이드가 자생할 자양분을 만드는 남매를 가만 지켜보기는 힘들었을 터다. 오빠를 죽여 달라 부탁하고서도 1년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줄곧 그림자를 좇은 세이라 마스다, 미련을 쉬이 버릴 수 있었을 리 만무하다. 냉정한 성미를 지녀 한 번 판단을 내릴 경우 망설이지 않았던 세이라도 샤아한테만은 몇 번이고 결정을 번복할 만큼 우유부단했다. 결국 끊어내기는 했지만 그 본인도 큰 상처를 입었다. 1년 전쟁이 끝나고서도 한동안은 샤아가 남긴 흔적을 찾았다. 오빠가 살아있는 것 같아, 하긴 죽을 사람도 아니지. 그런데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어. 왜 또 내 앞에는 나타나지 않는 걸까? 오빠는 늘 그래, 날 생각해주는 척하면서 늘 이기적인 짓만 해. 남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할 이야기도 넋두리처럼 했다. 본인도 추태라고는 생각했는지 며칠 지나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그 즈음 연방 감시가 심해진 탓도 분명 있을 것이다. 전쟁 판도를 뒤엎을 힘을 가진 존재가 뉴타입임을 깨달은 연방은 살아남은 뉴타입들을 지독히 추적했다. 세이라 마스와 아무로 레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온병사들을 퇴각하게 만든 아무로는 S급 주요인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연방 고위관료들이 쥔 권력을 위협할 경우 어떤 공을 세운 인물이든 남모르게 숙청되거나 감금되었다. 아무로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이라에게도 미행이 따라붙었다. 이게 무어냐 항의한 아무로와 달리 세이라는 꽤 여유를 보였다. 나, 어릴 때는 늘 사람들 시선 받으면서 살았거든. 알테이시아 님이라면서. 오히려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야. 그 추억 속에는 분명 샤아가 있을 터였으나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서로 상처 입을 뿐이었다. 그렇게 2년여가 흐른 어느 날 세이라가 헤어지자 했다. 여느 날과 같은 담담한 낯이었다. 언뜻 차갑게까지 보여 왜 헤어지자는 겁니까, 같은 당연한 물음마저 던지지 못한 채 안절부절 하는 아무로를 보던 세이라가 도통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이네, 긴 손가락을 자르륵 움직였다. 하얀 가락이 식탁 유리를 통, 통, 치는 순간마다 의식도 툭툭 튀었다. 번쩍번쩍 점멸했다 돌아오는 시야 사이서 세이라만이 온전했다. 누구도 그만은 침범치 못할 것이었다, 샤아조차도 건드리지 못할 이를 해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로 군한테는 내가 첫 번째가 아니잖아, 라라아 슨이지. 누군지는 묻지 않을게, 궁금하지 않으니까. 평정을 유지하지 못해 제가 그 이름을 불렀습니까, 주먹을 쥐었다간 폈다. 손가락이 달달 곱아들었다. 응, 거의 매일. 누구일까 생각해봤는데 역시 모르겠더라고. 말했다시피 그닥 궁금하지도 않고. 투명한 눈 가득 담긴 저는 새하얗게 질렸다. 단순히 파란 색을 덧입어서는 아닌 듯해 몇 번 마른세수를 하자니 추궁하려는 거 아니야, 난 마음정리 다 했거든. 이제 너와 더 이상 사귀기 싫어, 입매만 올려 웃었다. 세이라 씨, 부르려다가 그만 두었다. 입도 벙긋 못한 채 고개 숙인 아무로가 우스우면서도 가여운지 금빛 눈썹이 무딘 산 형태를 그렸다. 아무로 군을 원망하지는 않아, 따뜻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울컥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미 잊은 일로 아무로 군마저 괴롭히기는 싫어, 그런 취미도 없고. 그 다정함이 자신을 더 괴롭힌다는 사실을 알까, 꺽꺽 들이치는 울음을 식탁 한가득 쏟아놓았다. 검게 죽은 소리들이 비척비척 흔들리다 죽었다. 달래주는 대신 작게 한숨을 쉬고는 일어나는 손을 잡을 방도는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세이라 마스는 자유로워져야만 했다. 계속 함께였어도 좋지 못한 꼴만 봤을 터다. 아무로 군, 우리는 끝이야. 난 오늘 여길 나갈 거야. 당시에도 세이라는 괜한 희망을 주는 성격이 못됐다. 타고난 성정일 것이다, 샤아가 죽은 아버지에게서 책임감을 물려받았듯 그는 강단 있는 성미를 받았다. 난 이제 첫 번째 아닌 위치는 견디지 못하겠어. 너 때문은 아니야, 하지만 이 성격으로는 너와 잘 지내지 못하겠구나. 잘 있어, 아무로 군. 건강하렴. 그게 마지막이었다. 본디 자존심 강하거니와 고고한 세이라는 또 두 번째가 되기는 싫다며 떠나버렸다. 차마 전화를 걸 엄두도 내지 못하여 그냥저냥 살았다. 한때 동료인 카이 시덴이 그래도 전화는 한 번 걸어봐야 하지 않겠냐, 세이라 씨도 이젠 너 반가워할 걸? 꽤 무료하신 것 같던데, 몇 번 부추겼으나 인두겁을 쓴 이상 그래서는 안 됐다. 염치까지 잃어서야 짐승뿐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무료하게 살던 어느 날 다시 샤아가 나타났다. 한 톨 빛도 잃지 않은 채 화려한 모습을 뽐내는 샤아를 본 순간 숨통이 트였다. 샤아, 샤아 아즈나블. 그가 제 색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깨닫지 못하기도 힘들었다. 샤아를 보기 무섭게 온 숨구멍이 열렸건만 모르는 쪽이 이상했다. 그러나 납득하지 않았다, 깨달음과 인정은 별개다. 샤아는 그저 동료일 뿐이라 스스로를 부단 설득했다. 옛 숙적을 좋아한다고? 그보다 미친 짓이 있나? 만약 카이 시덴이 들었을 경우 와, 아무로 너 진짜 미쳤구나? 단단히 미쳤네, 전쟁 너무 한 거 아냐? 아무래도 브라이트한테 수정 몇 번 더 당해야 할 것 같은데? 진즉 혀를 내둘렀을 터이나 안타깝게도 아무로는 감정 숨기는 데 재주 넘쳤다. 재능보담 재주 혹은 기술이라 불러야 더 옳을 터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참았다. 곧 지나갈 열병이니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나는 쪽이 좋겠다며 자기 자신을 다독였다. 물론 틀렸다. 샤아를 잊지 못한 나머지 많은 이들에게 추태를 부렸다. 욕을 먹지 않아 더 괴로웠다, 그들은 아무로가 아직 1년 전쟁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분명하다 판단해 그저 아낌없는 동정만을 보여주었다. 이용당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 모습을 보자니 가슴 한 구석이 뻑적했다. 나는 이다지도 많은 사람을 속였는가, 아파보이는 모습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마당 한가운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용 구덩이를 팠을 것이다. 환부 없는 통증을 겪는 아무로를 꿰뚫어본 이는 벨토치카 이르마였다.
(후략)
아무로, 난 내일 모레 죽을 생각이다.
딴에는 퍽 고민했다 싶어 어쩌다 그런 결심을 다 했어? 언제 한 거야? 물으니 며칠 전? 눈을 한 번 끔벅였다. 그 모습이 꼭 갓 잡힌 물고기 같아 그래, 마주 꺼풀을 깜박인다. 이제 더 이상 살기 싫어? 물은 아무로한테서 시선을 뗀 샤아는 여느 때처럼 평온하다. 기실 샤아는 본인이 엑시즈와 함께 부서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늘 저런 상태였다. 스스로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최근에야 아즉 숨이 붙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런 때가 오리라는 짐작은 했었다,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지만서도 놀랍지는 않다. 샤아는 지구에서는 살지 못할 인류였다. 수없이 상황을 상정해봤기 때문인지 그리 화가 나지도, 답답하지도 않아 더 살 마음은 안 들어? 가만 물었다. 나랑은 살기 싫은가? 담백히 물은 아무로와 다시 시선을 맞춘 샤아가 넌 좋은 동거인이지, 아주 요점은 아닌 답을 냈다. 분홍색 혀 끝은 조금 갈라졌다, 지구낙하 때 잃어버린 살점이다. 결국엔 찾지 못했다, 불타버리거나 수장됐을지도 모르는지라 감히 찾을 엄두도 못 냈었다. 하지만 나는 그만 살래. 피곤해. 샤아가 아홉 살 무렵부터 서른넷까지 줄곧 고생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인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온 즘 다이쿤이 죽고서 샤아는 줄곧 지구와 우주를 맴돌며 이방인처럼 살았다, 뿌리 없이 떠돌았으니 사람 냄새를 풍기지 못하기도 당연했다. 샤아는 결국 누구에게도 인간은 되지 못했다, 아무로 역시 샤아를 완전히 사람이라고는 여기지 못한다. 벌써 만난 지 16년 차인 아무로조차도 그렇건만 뭇 평범한 이들이 샤아를 같은 인간으로 볼 리 만무했다. 네오지온 사람들은 제 2차 네오지온 항쟁 이후 실질적 사망처리나 마찬가지인 행방불명선고를 받은 샤아를 신처럼 떠받들었다. 죽음이 사람을 더 신성하게 만든 경우였다. 지온이 국부라면 샤아는 수호신이었다. 캐스발 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거야, 계속 항전하자! 이대로 무너지지는 못한다! 언제까지 저 연방놈들에게 굴복할 텐가! 이런 굴욕 더는 못 견딘다! 뜻은 좋았으나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잃은 스페이스노이드들은 바람 앞 등불처럼 스러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부 레지스탕스 이외에는 모두 잠잠해졌다. 그 모든 비참한 상황을 접하면서도 샤아한테는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건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빠졌다. 어차피 알았어도 이런 몸으로는 MS를 타기는커녕 분개밖에는 더 못했을 테지만 후회되기는 했다. 지금 말해줘 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터이므로 그냥 스패너만 몇 번 돌린다. 그래, 그렇구나. 하긴 너 고생 많이 했지. 이 이상 멋진 말은 떠오르지 않아 기름내 나는 손 들어 코 밑만 한 번 닦는다. 그래도 노고는 인정해주는구나, 아무로 군. 너한테 인정받을 생각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기쁘군…. 새벽 가로등 불빛이 거실을 은은히 물들인다, 이만 자야 할 듯해 내일은 뭐 할래? 마지막 날인 셈이잖아, 다리를 끌어당겨 앉는다. 무릎에서도 퀘퀘한 기름내가 나는 듯해 코를 몇 번 킁킁거린다. 글쎄, 잠시 생각한 샤아가 아, 조금 웃었다. 못해본 것들을 해볼래. 어릴 적부터 줄곧 정치와 군사 분야만 파온 샤아가 해보지 못한 일은 퍽 많을 터였으므로 그래? 그럼 삼박사일 이상 걸리지 않겠어? 턱을 괴니 그러니까 엑기스만 뽑아야지, 제법 쾌활하게 말한다. 이렇게 즐거워하는 샤아를 보기도 오랜만이라 그럼 적어봐, 할 수 있는 건 같이 해줄게. 웬만한 건 다 들어줄 테니까,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다행히 형편없이 떠는 추태는 보이지 않았다. 친절하구나, 아무로는. 마치 영생을 살 사람처럼 말하며 펜을 돌리는 높다란 콧대를 보다 곧 죽을 사람 부탁을 못 들어줄 건 또 뭐 있냐, 무릎과 옆얼굴을 맞댔다. 그렇군, 터지듯 웃은 샤아가 그럼, 짐짓 미간을 찡그린다. 금빛 눈썹 두 짝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멀어진다. 너도 알다시피 난 지온 즘 다이쿤 아들로서 모범이 될 일만 했거든, 게임센터 같은 데는 꿈도 못 꿨어. 군것질도 많이 못했지, 알테이시아는 꽤 했지만. 그 애, 단 거 좋아하지 않든? 세이라와 헤어진 지도 어언 20년 가까이 되었건만 그런 게 기억날 리 만무해 글쎄, 내 앞에서는 늘 홍차를 마셨는데. 단 거 먹는 모습은 거의 못 봤어, 인상을 찌푸리니 그새 입맛이 바뀌었나, 또 펜을 돌린다. 손등을 가로지른 흉은 꽤 짙다. 뭐, 그럴지도. 세이라 씨는 어른스러웠으니까. 늘 홍차나 커피를 마셨고. 나, 근 3년 간 사귀면서도 결국 세이라 씨랑은 말 못 놨거든. 어쩐지 계속 존댓말을 쓰게 되더라고. 샤아는 제법 놀란 얼굴을 한다. 파르란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그래? 알테이시아는 나름 붙임성이 좋은 아이였는데. 네가 붙임성이 없어서 그런가? 정말 금시초문이다. 세이라는 위압감은 있어도 친근감은 부족했다. 위엄 있는 외모와 분위기 탓일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화이트베이스 승무원들 중 그를 편하게 여긴 이는 거의 없었다. 존재치 않았다는 말이 더 적당할 터라 눈을 반쯤 내리 감으니 많이 변했겠지…. 세월이 흘렀으니까, 그립다는 양 웃는다. 세이라 씨한테는 전화하지 않아도 돼? 너 내일 모레 죽는다며. 알면 슬퍼하지 않을까. 대번 고개 저은 샤아가 이제는 나보다 네가 알테이시아를 더 잘 알 것 같은데? 뺨을 때렸으면 때렸지 슬퍼하지는 않을 걸, 나른히 엎드린다. 날씬한 등을 덮은 낙낙한 니트는 새까만 색이다. 척추 선을 따라 둥글게 주름이 졌다. 그리고 걘 이미 내가 죽은 줄 알잖아, 아무로 네 생사조차 모르는 애한테 굳이 연락할 필요 있나. 게다가 자칫 네가 살아있다는 걸 들킬 지도 모른다고? 짐짓 심각하다는 듯 인상을 쓰더니만 아, 곧 말갛게 웃는다. 하긴, 네 문제는 나지. 내가 없으면 숨지 않아도 돼. 그리프스 항쟁 시절보다 조금 더 긴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기고는 재차 펜을 돌린다. 긴 손가락 사이서 하얀 잔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아, 그래서. 나는 해보지 못한 게 많아서 사실 뭘 먼저 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 게다가 청소년기에도 줄곧 사관학교에 있었으니까. 군사 관련된 일이라면 질릴 만치 해봤지만… 너는 뭘 했나? 그래도 열다섯까지는 좋아하는 일을 했겠지? 생긋 웃는 얼굴을 보다 나도 별 거 안했어, 동그랗게 오른 무릎을 쓰다듬듯 쓸었다. 거의 매일 기계나 봤지. 그게 좋았고 그 외에는 별로 할 것도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건담을 만든다고 늘 바빴거든, 대체로 혼자 있었지. 네 말마따나 난 사회성도 크게 좋지 않고. 퉁명스레 말한 아무로와 눈을 맞춘 그대로 웃은 샤아가 아, 신경 쓰는군. 사회성 부족하다는 말 말이야, 부드럽게 웃고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제 볼을 몇 번 쓰다듬고는 다시 엎드리는 모습이 꽤나 생경해 갑자기 뭔 바람이 불었냐. 내일 죽을 거라서? 저도 몰래 더욱 불퉁히 말하니 그래서겠지, 따스하게 웃는다. 이틀 쯤은 솔직해도 되잖아? 계속 펜만 돌리는 손가락을 응시하다 빨리 적기나 해, 고개를 젓는다. 생각 중이야. 난 보통 어린애들이 뭘 하는지 모른다고. 난 군에만 있어서 민간 어린애들이 어떻게 노는지 전혀 몰라. 오히려 이쪽은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그리 물어봤자 아무로 역시 아는 바가 전무하다시피 하다. 프라우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요리를 좋아했으며 하야토는 그런 프라우를 쫓아다니느라 바빴다. 지금은 유명 저널리스트인 카이 시덴 또한 그 시절에는 장난꾸러기를 넘어 불량한 어린애였기에 생판 모르는 사람 차를 탈취해 놀러가거나 했었다. 지금 와서 차량을 도둑질하기도 애매하지 않은가, 곰곰 생각하는 아무로가 재미있는지 샤아는 모로 누운 채 계속 샐샐 눈웃음 쳤다. 나도 잘 모르겠다, 기계만 만졌다고 했잖아. 절로 모인 미간 새를 꾹꾹 누르며 뱉듯 얘기한다. 이 사이사이 걸린 소리를 혀 세워 긁어낸 다음 굳이 국한시킬 필요는 없잖아? 꼭 어릴 때 못해본 거여야 해? 파르란 눈과 시선을 맞댄다. 아무로를 담은 그대로 살풋 내렸다 오른 동자가 그렇지는 않지, 그럼 더 생각해볼까? 마치 본인은 제삼자라는 양 미소 짓는다. 샤아는 무언가 흡족할 시 꼭 저렇게 배부른 고양이처럼 입매를 올리고는 한다. 지금 당장은 죽기밖에는 하고픈 게 없어서…. 기분 잡쳐놓기는 덤이었다. 눅눅히 눌어붙은 기분 탓인지 점점 축 처지는 몸뚱이가 느껴져 나 먼저 씻는다, 일어나니 아, 오늘은 기계 그만 만지게? 마치 예부터 퍽이나 신경 써준 마냥 묻는다. 어차피 잘 시간이야, 지금 영 생각 안 나면 누워서 생각해봐. 어차피 내일 모레 죽을 거라며? 아직 50시간 가까이 남았네, 하자 와그르르, 나무토막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웃음소리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약 2초 정도 걸렸다. 아무로, 12시 땡 치자마자 죽으려 할 수도 있어? 어째서 50시간이라 생각하지? 고작 스물여섯 시간일지도 모르는데 너무 여유롭지 않나? 물론 너야 내가 죽어도 지금처럼 살아가겠지만. 손목 부분이 한참 남는 니트는 샤아가 말하는 순간마다 슬렁슬렁 흔들린다, 가는 손목이 드러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왼쪽 손에는 손등에서부터 손목까지 이어지는 긴 상흔이 있다. 벌써 낙하한 지 2년이 흘렀음에도 전혀 얕아지지 않았으니만큼 앞으로도 그대로일 터다. 죽어서도 남을 상처다.
(후략)
우주세기 건담 아무로 레이 x 샤아 아즈나블 회지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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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사람
-CCA 이후 계속 군복무 중인 아무로 레이와 강화인간이 된 샤아 얘기 / 19세 미만 구독불가
마스터, 오늘은 기분이 어떠신가요?
좋았는데 네가 완전히 잡쳐놨다고 할 수는 없으니만큼 그냥 괜찮아, 짧게 손만 내저었다. 그러신가요, 하지만 표정이 좋지 않으신 걸요. 제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졸졸 따라붙는 목소리를 괜찮아, 앉아있어. 아침 뭐 먹을래? 앉혀놓고는 앞치마를 두르자 마스터, 그건 제가 할까요? 순응하는 대신 기묘한 복종심을 보인다. 아니, 괜찮다니까! 내가 앉아있으라 한 거 못 들었어? 꼭 역정 한 번 듣고서야 죄송합니다, 무례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잔뜩 시무룩해져 소파를 찾으니 통곡을 해도 수백 번은 할 노릇이다. 인간화된 하로도 아니고 저게 뭐란 말인가, 갑자기 두통이 나 짧게 이마를 짚었다. 조금이라도 오래 올렸다가는 마스터, 어디 편찮으신가요? 또 걱정을 날리리라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이런 동작은 최대한 조용히 해야만 했다. 무어라 말을 건네는 대신 식탁 건너를 조용히 넘겨보았다. 거의 반쯤 누운 자세로 숨만 몰아쉬는 샤아를 본 순간 불안과 찌릿한 연정이 섞여 가슴이 묵직이 내리 앉았다. 샤아, 서둘러 달려가 말랐을 뿐더러 살 붙을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는 몸을 끌어안은 귓가로 주인님, 왜 그러세요? 파고들은 말씨는 무척이나 상냥하다. 마스터... 평생 들어온 목소리건만 저 호칭만은 아직까지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기실 행동도 그랬다. 제가 19년간 안 샤아는 누구보다 명석한데다 날카로워 타인을 절대 들이지 않는 사내였을진대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되었는가. 아무로는 제 목덜미를 감싸오는 팔을 느끼며 가만 꺼풀을 감는다.
제 2차 네오지온 항쟁이 끝난 후 포로로 잡힌 샤아는 은둔 귀재답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연방은 당장 닥친 일밖에는 생각할 줄 몰라 저 녀석이 다시 나타날 경우 어째야 하느냐 발을 동동 굴렀으나 아무로 제 생각은 전혀 달랐다. 겉은 멀쩡해도 지구낙하 당시 온 내장이 다 찢어져 망가진 애가 도대체 어딜 갔느냐, 오래 살기는 하겠느냐는 생각뿐이 들지 않아서 미친 듯이 온 콜로니를 뒤졌다. 두 계급 특진해 소령이 되고도 우주 탐사와 경비 역을 자원한 데는 그 이유도 있었다. 남 잘 되는 꼴을 도통 보지 못하는 고위 관료들이 저렇게 꼭 착한 척하는 애들이 대중 인기를 얻어 한 자리 잡아보려 한다고 던진 빈정거림은 무시했다. 애시당초 처음 건담을 탔을 적부터 듣지도 않았다, 만약 제가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들까지 다 신경 쓰는 성격이었더라면 군인생활 오래 해먹지도 못했을 터였다. 과거 네오지온 확립기 시절 7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지하 온 곳을 전전하며 기회를 엿본 샤아를 모르지 않았기에 마침내 영원한 평화를 맞이한 마냥 온 세상이 조용해져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했다. 이런 적막을 찢어 나타나는 놈이 샤아임을 누구보담 잘 알았다. 그리고 양반은 못 되는 샤아는 예상대로 2년 정도여가 지나고서야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온전한 형태는 아니었다.
붉은 MS입니다! 샤, 샤아인가?! 아무로 소령님, 소령님이 와보셔야 할 것...! 그 말만을 남긴 채 산화해버린 제 부하를 대신해 출동한 눈 가득 비친 기체는 과연 시뻘갰다. 거대한 몸체와 짧은 팔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저게 그 네오지온이 개발했다는 신형인가... 언뜻 정보를 받아본 적은 있었다. 정확한 기체명은 모르겠습니다만 저쪽은 이걸 나이팅게일이라 부르더군요, 설마 백의의 천사는 아니겠지요. 너무 빨갛잖습니까, 샤아 용인 건지. 어쨌든 그 녀석 살아있기는 할 테잖니까요, 제 기체를 봐주는 엔지니어가 한 말이 귀를 쟁쟁 울렸다. 정말 샤아인가, 가슴이 바짝 달아 무작정 샤아! 외쳤다. 아무로 레이? 그 목소리에는 예전과 같은 절절한 감정이 없어 무언가 잘못됐다 생각했다. 뭐지? 이 위화감은 뭐지? 분명 샤아인데, 이런 목소리와 울림을 가진 사람은 걔 밖에는 없을 텐데...! 몇 번 주먹만 쥐었다 폈다 하다 샤아 맞지? 너지? 재차 물었다. 다 불탄 MS를 보던 모노아이를 스산히 돌려 공격 자세를 잡는다. 샤아 아즈나블, 너냐고! 대답하랬잖아! 순간 아무로 레이, 그 이름이 코드명처럼 우주를 울렸다. 너는 내 적이다. 판넬이 일점사격 형으로 모였다.
마스터의 명을 따라 너를 제거하겠다.
마스터...? 명령...? 네가 왜...? 그 생각을 미처 끝마치기도 전 공격이 쏟아들어 와 우선 몸을 피했다. 젠장, 샤아! 좀! 사람 말 좀 듣고...! 2년 전보다 훨씬 날카롭기는 했으나 어딘가 패턴이 단순한 구석이 있어 막지 못할 류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예전 공격이 훨씬 변칙적이었다, 판넬을 하나하나 쏴 부서뜨리고서야 비처럼 쏟아 내리는 위협을 피할 수 있었다. 샤아, 샤아. 어째서 지금 나타난 거야? 마스터가 뭐야, 넌 누구 명령도 안 듣는 애였잖아! 게다가 그 호칭, 너무 강화인간 같다고...! 찰나 무슨 소리인가, 아무로 레이? 의문 가득한 소리가 터졌다.
나는 강화인간이다. 네가 나를 어떻게 알지? 너는 내 적인데.
무언가 잘못됐다, 고 생각했다. 강화인간? 강화됐다고? 그럼 내가 아는 샤아는...? 틈을 보이기가 무섭게 파고들은 붉은 기체를 간신히 막아냈다. 샤아, 정신 차려! 넌 강화인간 따위가 아니야, 알잖아! 강력한 사유를 보내도 돌아오는 말은 몰라, 뿐이었다. 몰라, 아무로 레이! 몰라! 나는 강화인간이다, 너는 내 적이다! 나는 마스터가 내린 명을 받들어 너를 죽일 뿐이다! 나를 현혹시키려 하지 마라...! 번쩍번쩍 벌겋게 빛나는 빔 샤벨이 제 눈을 찌르는 듯해 급히 기체를 뺀 다음 판넬을 전개했다. 샤아, 너를...! 허나 다음 동작은 이뤄지지 못했다. 익숙하니 전투 모드를 종료하고는 오늘은 이만 끝내지, 아무로 레이. 마스터께서 부르신다, 널 상대해줄 시간 따위 이제 없어. 다음에는 꼭 죽이겠다, 뒤돌아 유유히도 가버리는 샤아를 그저 멍하게 보고만 있었다. 뒤늦게 응전 소식을 접하여 찾아온 브라이트가 아무로, 아무로! 뭐하나, 방금 전 그 MS는 뭐였어! 네오지온이 개발한 신형인가?! 외칠 때까지 멍청히 서있기만 했다.
물론 함을 밟고서도 멍청히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민히 움직였다. 브라이트, 아무래도 샤아가 강화인간이 된 것 같아. 온갖 상황을 접해듣는 함장인 만큼 기절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놀랍기는 한지 그 샤아가? 내가 아는 샤아 아즈나블 얘기 맞지? 여러 번 되물은 브라이트에게 그래 맞아, 우리가 아는 그 샤아 아즈나블 얘기야. 네오지온 총수였던 애 말이지, 가만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펜을 부러져라 쥐었다. 누가 감히 그 애를 그렇게 만들었지? 누가? 함장석에서 내려와 우주 지도를 펼쳐 앉은 단정한 미간에는 1년 전쟁 시절에나 본 고뇌가 가득했다. 샤아가 강화인간이 됐다고, 이거 큰일인걸. 뉴타입 능력도 분명 강화됐을 거야, 일반 파일럿들이 상대했다간 일방적인 학살이 될 테니만큼 그들은 물리는 편이 좋겠어. 아무로, 네가 전담으로 맡아야 할 것 같은데. 이건 벌써 연방 귀에도 들어갔을 거야, 틀림없이 그 겁쟁이들은 네게 일을 떠넘기겠지. 네가 제대로 못 처리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냐고. 너도 예상은 되지, 아무로? 게다가 방금 전 또 놓쳤으니까. 달리 할 말도 없어 인상을 찌푸렸다. 연방이 벌이는 호들갑쇼나 책임전가를 보기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해도 역시 마치 온전히 개인 잘못인 마냥 호도하는 모습은 짜증났다. 그나저나 그 샤아가 강화인간이라니, 믿을 수 없어. 그렇게 자의식 강한 애가...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콱 깨물었다. 내장이 다 짓이겨져 오늘내일하던 중이었으니만큼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는 없다 결단했는지도 몰랐다. 정신개조 쪽은 물론이고 세포배양 분야도 연방을 한참 앞서는 네오지온으로서는 유일한 지도자를 잃기보다는 차라리 윤리를 어기는 편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을 터라 납득은 갔다. 허나 그와 이해는 다르다, 겨우 이기심 때문에 샤아는 저 꼴이 됐단 말인가, 죽지도 못한 채 정신마저 잃고. 부들부들 떠는 어깨를 진정해, 아무로. 진정하라고, 몇 번 두드린 브라이트가 우주 지도를 두드렸다. 네오지온 본거지는 이쪽이야, 아마 샤아 상태가 안정되자마자 새 국가를 천명할 예정이겠지. 강화인간 자아를 확립시키기 위해서는 최소 3년이 필요해. 앞으로 1년간은 계속 지금처럼 게릴라전을 벌이겠지. 예전 붉은 혜성 명성도 다시 좀 되찾아주고... 너무 냉정하게 들리나? 하지만 이게 현실이야, 아무로. 너도 알잖나. 어쨌든 네오지온 놈들 속은 빤해. 새로운 국가를 선포하기까지 남은 기간동안 샤아를 계속 실전 투입해 뉴타입 감각을 길러줄 셈인 거다. 아무로 너는 그저 연습상대일 뿐이지. 우리는 그걸 역이용해야 해, 그 방법밖에는 없어. 연방이 본격 개입하기 전 샤아를 생포한다. 그게 우리 계획이야. 지금 당장은 연방이 샤아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싫어 그 무거운 엉덩이만 뭉갤 테니 기회는 이때야. 샤아를 어떻게든 생포하자, 내가 돕겠다. 당장은 나도 크게 맡은 임무가 없으니까. 상부에는 샤아가 살아있는 것 같으니까 조금 조사해보겠다는 언질만 남긴 다음 우리끼리 해결 보자고. 아무로 너는 이 근처 보급부대를 찾아라. 나는 상부 쪽 구 에우고 인사들과 접선을 해볼게. 연방 정부가 본격적으로 손을 댈 경우 샤아를 빼낼 수 없으니까. 사실 나는 크게 상관없지만 너는 신경 쓰이잖아, 그렇지? 정곡을 찔려 그럼 출격할게, 고마워 브라이트. 늘 신세만 지네, 부러 태연한 척 일어서자 난 널 이해해, 아버지처럼 엄격하면서도 다정한 어조가 등을 두드렸다. 난 널 이해한다, 아무로. 네가 샤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대충은 알 것 같아. 너무 오만한가? 입을 여는 순간 울음이 섞일 것 같아 몸 돌린 그대로 손만 까닥이고는 함장실 문을 나섰다. 상부와 연락은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넌 샤아 잡기에만 집중해라. 알았지? 그 배려가 너무나도 황송해 알았어, 브라이트. 정말 고맙다니까, 간신히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방금 전 들은 감정 하나 없는 목소리가 귓가를 아룽아룽 적셨다. 아무로 레이, 제 이름을 그렇게 무기질적으로 부를 줄은 상상조차 못했기에 타격은 더했다. 언제나 감정을 가득 담아서 불러줬었는데, 이렇게는 아니었는데... 급작스레 터진 울음은 멈출 새를 몰랐다. 아, 아무로 소령님! 오랜만입니다, 2년만이지요? 인사를 하려 다가온 사람들도 상황을 파악하고는 바삐 자리를 피했다. 함장님이 소령님을 혼내기라도 하셨나봐, 하긴 1년 전쟁 동료셨다니까. 하여튼 우리 함장님도 참 엄격하시지, 중간을 모르셔. 그래도 최근에는 꽤 유해지셨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봐, 걱정 섞인 수군거림들을 피해 얼른 콕핏 깊이 몸을 숨겼다. 샤아, 눈물로 얼룩져 척척해진 볼을 뭉개듯 닦아낸 다음 서둘러 조종간을 잡았다. 하루가 급했다.
과연 전투를 수백 번 역전시킨 경험이 있는 베테랑 함장 브라이트 노아는 선견지명도 지닌 사람이었다. 근 2년을 보상해주겠노라는 양 미친 듯이 샤아를 출격시키는 네오지온을 막을 자는 천재이자 기막힌 감을 가진 아무로 레이뿐이 없었다. 역시나 당장은 샤아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공표할 수 없으니만큼 당분간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길 바란다는 전언을 보낸 연방에게는 무엇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사실 이번에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편이 좋기도 했으므로 그저 알겠다, 하지만 연방정부가 개입하기 전 우리가 먼저 샤아를 잡을 경우 처리권을 완전히 넘겨달라는 답장만 보냈다. 기실 연방으로서도 잡아와봐야 처치곤란인 인간이 샤아거니와 무엇보담 아무로가 맡을 시 저번처럼 탈주한다 해도 남 탓할 수 있기에 선선히 승낙해준 것도 당연했다. 다만 못 잡았을 때는 브라이트 노아와 아무로 레이가 모든 책임을 져야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어쩜 눈엣가시인 둘을 같이 보내버리겠다는 심산인 듯도 하여 그저 허허 웃었다. 정말 대단하지, 연방도. 하나도 안 변했어. 앞으로도 안 변할 걸? 이러니까 샤아가 열 받았지. 그 어느 날 제가 한 말을 그대로 읊는 브라이트를 보며 그거 내가 한 말 아닌가, 미소 띤 그대로 어깨를 으쓱했다. 이 말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연방군 중 있으려고? 함장석을 박차 일어나 다시 우주 지도를 펼친 브라이트는 조금 전보다 훨씬 진중한 낯이었다. 샤아 기량이 점점 더 올라와. 붉은 혜성이라는 말이 무색치가 않아. 전투 패턴도 처음에는 제법 정석적이었는데 지금은 정말 변화무쌍하다. 최대한 빨리 승부를 내야겠어. 아무로 너도 동의하지? 강제로라지만 완전한 뉴타입이 됐으니만큼 이제는 너와 싸워도 아주 밀리지는 않을 거야. 실제로 예전에도 확 밀리지는 않았잖아. 그 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어쨌든 지금 이는 중요하지 않지. 벌써 보급부대들이나 최전선기지들이 많이 파괴됐어. 아주 가루가 됐지. 연방 정부는 요지가 아니니만큼 그냥 두고 보자는 입장인 듯하지만 나 같은 사람들한테는 중요도가 다르거든. 갑자기 연료가 떨어지거나 함이 고장 났을 때 갈 곳이 없어져서는 곤란해. 고위 관료 놈들은 실무를 몰라. 그 말을 듣다 알았어, 다리를 바꿔 꼬았다. 본거지로 쳐들어가는 쪽이 좋을까? 아님 샤아를 따로 유인하는 게 나을까. 어느 쪽이 낫겠어, 브라이트?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전폭적인 지원이 없으니까 최대한 머리를 굴려야 해. 필요할 경우 육탄전도 불사하겠어. 샤아와는 몸 부딪혀본 적이 있다. 조용히 말한 아무로 쪽으로 돌은 검은 눈이 솔직히 말하자면, 팔짱을 꼈다. 지금은 육탄전을 피하는 게 좋아. 샤아가 강화인간이 됐잖아. 강화인간들은 힘도 세다고, 귀여운 외모... 아니 샤아는 잘생긴 거지만 여하튼. 귀여운 외모와 달리 힘이 아주 장사들이야. 샤아도 그렇게 강화됐을 확률이 높아서 그건 별로 추천하지 않아. 네가 맞아 죽어서는 정말 곤란해, 아무로. 그런 개죽음을 당했다간 우주가 격변을 일으켜. 샤아를 막을 자가 없어지는 거잖아, 카미유 비단과 쥬도 아시타는 이미 은퇴한지 오래라고. 그 애들을 다시 데려오기는 싫어. 잘 벗어난 애들을 다시 전쟁터로 끌어들이는 일만은 피하고 싶어. 너도 내 말 알지? 그 애들은 너와 달라, 전쟁을 좋아하지 않아. 아마 불러도 오지 않을 거야. 아, 카미유는 오려나? 크와트로와 친했으니까. 갑자기 울컥 짜증이 솟아 나도 전쟁을 좋아하지는 않아!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난 그저 샤아가 있어서... 벌컥 일어났다 다시 주저앉았다. 샤아가 있어서. 제 목소리가 뇌를 들쑤셨다, 아무 말 않은 채 꺼먼 지도만 펄럭이는 남자다운 손을 멀거니 응시했다. 샤아가 있어서 그랬어. 브라이트는 언제나처럼 냉정한 낯이다. 이번에도 샤아가 있지, 아무로 네가 나서야겠군. 우리 선에서 끝내자고, 이번에도 죽을 각오로 보조해줄 테니까. 팔락이는 지도 끝을 잡아 천천히 끌어내리고는 시선을 맞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서로가 어떤 생각인지는 또렷이 보였다. 함께 사선을 넘나든 동료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선이었다, 뉴타입끼리 하는 공명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지만 훨씬 안정적이었다. 알았어, 브라이트. 이번에도 믿어. 맡겨만 달라는 듯 상대가 손을 들어보였다.
각개전투인지라 시간은 무한정 늘어졌다. 특히 샤아가 적을 죽여 버리겠다 이를 갈면서도 마스터 명령 없이는 제대로 나서지 않아 더욱 그랬다. 아직 아무로 레이와는 1:1 전면전을 할 실력이 못 된다 판단했는지 네오지온 상층부는 좀처럼 다운 전투를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불이 붙으려고만 하면 돌아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적기가 오기를 기다리다 결국 먼저 나서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브라이트, 다음에는 만나자마자 내가 공격을 퍼부을 거야, 알았어? 맞춰서 지원해줘. 헬멧을 내던지다시피 벗은 다음 노멀 수츠마저도 거칠게 풀어내려 숨구멍을 틔운 아무로 쪽으로 다가온 브라이트가 그게 최선일 것 같아? 네가 내린 판단이니만큼 정확하겠지만,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아무래도 안 되겠어. 샤아 기량이 더 발전하기 전 일을 마무리지어야 하는데 완전 시간끌기라고. 벌써 3개월이 지났어, 9개월 남았다. 연방이 전쟁 진행이 지지부진하다 판단해 언제 개입할지도 모르건만 이대로 여유롭게 봐줄 수는 없어. 브라이트, 너도 언제까지 여기 매달리기는 힘들잖아? 다들 막다른 골목이라고, 게다가 샤아 상태도 봐야해. 강화인간이 됐잖아... 얼마나 더 강화됐을지 모른다고, 점점 감정이 사라져가고 있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느껴, 그 녀석이 얼마나 강화됐는지. 이제 내가 아는 샤아는 거의 없다 봐도 좋아... 처음에는 그래도 조금은 느껴졌는데... 또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눈두덩만 꾹꾹 누르니 툭툭, 다정스런 손길이 와 닿았다. 아무로, 진정해. 그건 데려와서 걱정해도 될 일이야. 샤아를 되찾는 데만 집중하자고, 당장은... 브라이트 역시 혼란스러워 하는 기색이 만연했으나 저까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알아, 안다고. 누구보다 잘 알아. 다 끝나고 해결 봐도 되지. 그런데. 훅 북받쳐 목 끓이는 설움을 간신히 삼켜 내렸다. 내가 아는 샤아가 없어진다는 거, 그게 얼마나 괴로운 지 알아? 하루건너 몇 번씩 마주치는데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거야. 그게 얼마나, 얼마나 버티기 힘든 일인지 알기나 해? 내가 16년간 알아온 샤아가 사라지는 중이야, 나는 그래서. 두 손을 펼쳐 얼굴을 묻었다.
너무 괴로워.
이제 그 녀석은 정말 처음 보는 강화인간이나 마찬가지야.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해, 이제는 혼란스러워하지도 않아. 그래도 첫날은 어떻게 네가 나를 아느냐 묻기라도 했거든. 지금은 뭐라는지 알아? 아무로 레이, 너는 내 적이다. 너를 물리쳐야 온 세상이 평화로워진다, 그 얘기만 해. 내가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아. 자길 현혹시키는 거라고도 여기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니까! 기억나지 않으니까. 브라이트, 나는... 마침내 쏟아진 울음이 하얀 바지를 점점이 물들이는 모양새를 어쩔 수 없어 브라이트는 그저 가만 서있었다. 나는, 언제나 내가 샤아를 죽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만 걱정했거든. 그런데 이제는 다른 걸 걱정해. 무릎을 감싼 손등 가득 선 핏줄은 무척 남자다웠으나 그 손목 위로 이어진 어깨는 갓 전장을 밟은 소년이라 해도 괜찮을 만치 여려보였다.
샤아가 날 잊으면 어쩌지?
샤아가 날 잊을 수도 있어, 이미 잊었을 지도 몰라. 어떡해? 나는 나를 모르는 샤아 따위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 내가 그 애를 쫓았듯 샤아도 언제나 나만을 쫓았단 말야. 그런데, 그런데 이제 샤아는 제 마스터가 명령을 거둘 경우 나를 보지도 않을 거야. 내가 덤벼들어도 너는 내 적이 아니니까 물러서라며 귀찮다는 듯 손짓이나 하겠지. 내가 그걸 봐야해? 브라이트, 나 샤아 찾아야 해. 마지막은 거진 애원이었다. 거의 무릎 꿇어 브라이트를 붙잡아 외쳤다. 브라이트, 나 샤아 되찾아야 해. 누군가 그 애한테서 나를 도려내는 꼴, 나는 못 봐. 절대 못 봐, 그러니까 도와줘. 도와줘, 브라이트. 부탁이야, 연방정부에게도 뺏길 수 없어. 손등을 척척히 적시는 눈물을 대충 바지 여기저기 문질러 닦아내고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당혹스런 낯을 한 어깨를 꽉 눌러 잡았다.
샤아는 내 거야.
나처럼 그 애도 나만 봐야 해. 알았어? 그러니까 다음 대적 때는 그 애가 도망쳐도 내가 끝까지 쫓아갈 거야. 설사 육탄전을 하게 된다 해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그럼 고맙지, 기절시켜서라도 데려올 테니까. 날 제대로 지원해줘, 이번에야말로 네오지온을 완전히 부숴버리겠다. 샤아만 데려와도 다음은 정부가 알아서 해주겠지, 그 정도 힘은 있는 놈들이니까. 에너하임 사나 거래처가 사라져서 조금 안타까워하겠군,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잘 자, 브라이트. 대답을 듣는 대신 문을 박차 나갔다. 브라이트 역시 만류하지 않았으므로 그대로 그 날 회의는 막을 내렸다.
다음 날 출격을 준비하다 아무로 대위님, 오늘 결판을 내실 예정이시라면서요? 만약 샤아와 만날 경우 말이죠, 정말 기대됩니다. 1년 전쟁 영웅이신 아무로 님을 도울 수 있다니요, 넉살 좋은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위치를 확인했다. 과거 화이트베이스 동료 류 호세이와 하야토 코바야시를 연상시키는 퉁퉁한 몸을 보자 괜히 마음이 너그러워져 그래, 담담히 장갑 단추를 채웠다. 샤아가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어요, 정말 대단하네요. 적이지만 솔직히 대단해요, 그렇지 않나요? 그와 싸우는 아무로 소령님은 더 대단하시지만요, 웃음 섞인 말에는 그래, 형식적인 말뿐이 건넬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샤아를 되찾아 다시 저를 박아 넣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움직이는 머리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해야 한다는 기본적 교류 프로세스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상대가 너무 긴장해 대답을 삼간다 생각했는지 그럼 오늘도 힘내십시오, 소령님. 저희가 확실히 보조하겠습니다, 여전히 웃는 낯을 한 채 저 멀리 걸어가는 남자를 응시하다 푸, 짧게 어깨며 손목을 털었다. 확실히 긴장되긴 한다, 2년 전 제 2차 네오지온 항쟁 시절 이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육탄전을 31살이 된 지금 와 잘 할 수 있을까도 의문이었다. 달리 선택지가 없으니까, 허벅지 춤 즈음 달린 권총과 레이저 건까지 확인하고는 무언가 열심히 지시하는 브라이트 쪽으로 향했다. 브라이트, 제법 엄중한 낯을 한 그대로 허리만 돌려 왜 그러지, 아무로? 뭐 당부할 사항이라도 있나? 물은 그에게 어제는 정말 미안했어, 까닥 머리를 숙였다. 흥분했었나봐. 그렇게 몰아붙일 의도는 아니었는데 정신차려보니 그렇게 됐네.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미안해. 이렇게 복잡한 일은 처음이라는 양 허리를 짚은 채 푸우, 마냥 한숨만 쉬던 브라이트가 이해해 아무로, 함장석을 등졌다. 근 20년 전보다 나이든 얼굴을 마주하니 갑자기 짠해졌다. 그에게도 내가 이렇게 보일까, 15살 어린 꼬맹이가 참 잘 컸다 생각할까. 알 수는 없다, 제아무리 뉴타입이라도 일반인들 머릿속을 꿰뚫어볼 능력까지는 없어 그냥 발끝만 뭉갰다. 네가 샤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 넌 그 애를 무척 좋아하지. 그리프스 항쟁 때도 그렇게 생각했어, 넌 정말 샤아를 좋아하는구나. 하지만 지금은 냉정해야 해, 냉철하지 못해서는 아무것도 안 돼. 왠지 알아? 그 샤아가 지금은 너보다 더 냉정하거든, 널 잊었는데 라라아라고 기억할 것 같아? 아니, 걘 지금 라라아도 모를 걸. 아마 마스터와 제가 적이라는 밖에는 알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네가 냉철해야 한다고, 아무로. 나는 지원역이지 너와 함께 최전선을 달려주지는 못해. 어디까지나 난 네 보조고 네가 무너질 경우 나 또한 목숨을 보장할 수 없어. 분명 눈엣가시였을 나부터 죽이겠지, 당연해. 난 그걸 무릅쓰고 널 돕는 중인 거다, 출세에도 전혀 도움 되지 않을 짓을 하는 거야. 그게 내 정의니까. 아무로, 네 정의를 관철하길 원하나? 그럼 머리 좀 식혀. 이 꼴로는 개죽음이나 당할 거다. 샤아는 전성기적 기량을 거의 회복한 데다 뉴타입 능력도 강제 개화해 어쩜 2차 네오지온 항쟁 시절보다도 더 강해졌을지 모른다. 너는 그런 놈과 싸워야 하는 거야. 모쪼록 조심해라, 아무로. 최선을 다해 지원해줄 테지만 결국 칼자루를 쥔 사람은 너야. 너 말고는 아무도 결판을 낼 수 없어. 샤아는 이런 전함에 무릎 꿇을 녀석이 아니다. 잊지 않았지? 1년 전쟁 시절 녀석이 왜 공포의 대명사였는지. 혼자 다섯 척을 없앤 녀석이야, 그 실력은 여전할 거다. 아니, 그대로지. 잘 싸워, 네가 무너질 시 우리도 끝장이다. 물론 연방도 끝장이지, 아무도 샤아를 막지 못할 테니까. 전선을 떠나 일반인이 된 카미유와 쥬도는 실전감각이 떨어져서 바로 샤아에게 대항하지 못할 거야. 그 사이 몇 명이 더 죽을지는 알 수 없어. 정말 모를 일이야, 그러니만큼 우리 선에서 끝내자. 우리가 그나마 실전감각이 쌩쌩하잖아? 힘내자고, 아무로. 우리는 같은 배를 탔어. 어쨌든 난 네 제안을 받아들인 직후부터 계속 네 편이었으니까. 연방 정부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고 말이야, 툭툭 격려하듯 어깨를 치고는 다시 함장 석으로 올라가 우현을 체크해! 무기는 발포 가능한 상태인가? 한 치 실수도 범해서는 안 돼! 다 생사와 직결된 것이다! 이런 데서 죽어서는 안 되지 않겠나! 위엄 있게 소리치는 옆모습이 믿음직스러워 살짝 웃었다. 그렇다, 어쨌든 샤아를 막을 이는 자신뿐이다, 그가 어떤 모습이 됐더라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이 역시 저밖에는 없었다. 힘내자, 아무로는 제 헬멧을 끌어다 가볍게 입 맞춘 다음 자리를 박찼다. 아무로 소령님, 힘내십시오! 오늘도 무사귀환하시길 바랍니다! 우렁찬 소리들이 뒤를 따랐다.
전투가 고조되자 어김없이 등을 돌려 도망치는 샤아를 미친 듯 뒤쫓았다. 당사자나 명령을 내리는 네오지온 상층부 관계자들 역시 이 상황은 예측하지 못했는지 붉은 기체는 시종일관 우왕좌왕했다. 2차 네오지온 항쟁 시절 사아였더라면 분명 소행성이며 운석덩이를 깨부숴 잔재를 남겨 유려히 도망갔을 터이나 지금은 아직 강화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길 찾기에만 급급했다. 아무로 레이, 왜 나를 쫓아오지? 내가 너의 무엇인데? 답잖게 교란까지 시도하는 꽁무니 끝을 바짝 따르며 아주 박살을 내 주마, 무기를 꼬나 잡았다. 아무로 레이, 나는 오늘은 너와 싸우지 못한다!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어! 전면전을 벌여 몸을 상하게 하기 보다는 저희 영역으로 돌아와 지원사격을 받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 생각한 모양인지 네오지온 상층부는 끝끝내 공격 명령을 보내지 않았다. 하기사 아직 전투 방식마저도 완전히 익히지 못해 여기저기 실수연발인 애를 인생 절반 이상을 전쟁터에서 보내 베테랑 중 베테랑이라는 소리를 듣는 아무로와 대적시켜봐야 결과는 뻔했다. 그래서, 봐주라고? 쫓아오지 말라고? 이건 전투야, 샤아 아즈나블! 이런 돌발 상황 시뮬레이션도 안 돌려봤어? 어쩐다, 나는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서. 이 아무로 레이를 뭘로 본 건가?! 오늘 널 아주 아작 내주겠다. 널 가만 두지 않겠어! 응전을 하든 약점을 보이게 하든 하기 위해 부러 강한 말투를 쓰자 아무로 레이, 네가 감히...! 목 가장 깊은 곳 즈음부터 그르렁대는 울음을 냈다. 마스터! 싸우겠습니다, 싸우게 해주십시오! 그 말이 가슴을 뚫었다. 마스터, 마스터. 조종간을 꽉 움켜쥔 채 그 꽁무니를 노려보다 죽여 버리겠어! 정말로, 정말로 죽여 버릴 거야! 빔 샤벨을 들어 다리 한 짝을 잘라놓았다. 윽?! 예기치 못한 일격을 받아 당황했는지 얼른 방향을 틀어 저를 마주본 기체의 다른 쪽 다리 부분에 다시 무기를 꽂아 넣었다. 터뜨려서는 안 된다, 터지는 순간 샤아도 죽고 만다. 신중히 되뇌며 느릿히 몸을 떨어뜨린 찰나 감히 네가 나를, 짐승울음 같은 악 받힌 비명이 올랐다. 오늘에야말로 너와 결판을 내겠다, 아무로 레이! 너를 내가...! 아, 아...! 칼날처럼 쏘아 보낸 무시무시한 경고가 무색하게도 그 맹렬한 움직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췄다. 왜, 왜 싸우지 못하게 하십니까! 왜요! 아, 아 머리가 아파! 그만, 그만! 싸울래, 싸우겠습니다! 아, 아아, 머리가...! 아무로는 직감했다. 이건 강화다, 마스터가 내린 명령을 거부하려는 강화인간을 벌하기 위함이다. 샤아를 위해서는 더 공격해야한다, 그리 판단하기가 무섭게 다시 빔 샤벨을 꼬나 잡았다. 판넬을 써 여러 군데서 공격하는 편이 훨씬 편하기는 하겠지만 그랬다간 엔진이나 중요 파트가 손상돼 폭발할 지도 모르거니와 무엇보담 네오지온 상층부 관료들에게 이길 수 있는 상대라는 인식을 주는 쪽이 중요해 부러 아슬한 방법을 택했다. 게다가 기체가 완파될 지경이 될 경우 저쪽에서도 결국 임전하라 하겠지, 이게 샤아를 위한 길이야. 여즉 괴로워하는 몸뚱이를 붙잡아 가슴 부분끼리 부딪치자 아악! 고통 담긴 비명이 올랐다. 미안, 미안 샤아. 하지만 어쩔 수 없네, 입술을 잠시 깨물었다 놓고는 여기서 완전히 부숴주마, 목을 긁었다. 네 말마따나 너와 나는 너무 악연이야! 너는 내 적이지, 아무래도 여기서 숨통을 끊어놓는 게 앞으로도 편하겠군 샤아! 수많은 전장을 헤쳐 온 베테랑 함장인데다 원래도 파일럿 역량을 믿는 브라이트는 파일럿들이 임무 수행만 잘 해준다면야 무슨 소리를 하든 모두 작전이겠거니 신경 쓰지 않았으므로 굳이 말 수위를 조정할 필요는 없었다. 마스터, 마스터 제발, 제발 전투 명령... 명령을... 제발 부탁입니다...! 이 와중에도 저를 쳐다보기보다는 마스터 구원만을 애타게 바라는 그 모습이 짜증나 이쪽이다, 샤아! 네 적은 나야! 기체 옆구리 쪽을 거칠게 걷어찼다. 크윽...! 개자식이! 아, 아아! 마스터, 제발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직감이 듦과 동시에 나머지 다리 한 쪽까지 잘라냈다. 1년 전쟁 시절 막바지 때 본 기체와 모양새가 비슷해져 조금 눈물이 났지만 내색했다간 일을 그르칠 확률이 높아서 마음만 다졌다. 마침내 붉은 기체가 태세를 다졌다, 아무로는 온몸을 긴장시켰다.
이번에야말로 죽여주겠다, 아무로 레이!
그거, 예전에도 한 말인 거 알아 샤아? 부질없는 물음은 던지지 않았다. 그리도 소중히 여긴 라라아조차도 잊어버렸는데 그런 단편적인 조각들을 기억하리라고는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이대로 유인하다 기체를 폭발 직전까지 이끌어야 해, 샤아와 육탄전으로 승부를 본다. 물론 쟤는 당연히 안 내리려 할 테지만 인망 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네오지온 상층부 놈들이 가만 지켜볼 리가 없지. 아마 분명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릴 거야, 대충 예측을 갈무리한 다음 브라이트를 호출했다. 왜 그러나, 아무로? 네 예상대로 되어가는 중인 거지? 혹시 빗나간 곳이 있나? 그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를 듣자 마음 한 구석이 시원해졌다. 아니, 없어. 앞으로 내가 할 일을 말해주려고. 우선 샤아를 내리게 할 거야, 내가 육탄전을 시작하면 지원군을 보내줘. 파일럿인 게 좋겠어, 샤아를 데려갈 거다. 아마 저쪽에서도 잔챙이 파일럿이나마 보낼 테니만큼 MS인 쪽이 훨씬 좋겠지. 내가 다시 콕핏을 닫을 때까지만 부탁해. 그리고 아마 샤아는 이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정말 아무것도... 그러니까... 이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연방 몰래 강화인간 조정 기계를 빌리고 싶어. 티탄즈 연구소 쪽에서 쓰다 버려둔 게 어딘가 남아있다 들었어. 카이나 벨토치카 혹은 과거 에우고 녀석들에게 연락해줘. 물론 카이야 대번 질색팔색을 하겠지만... 어쨌든 부탁해, 시간이 없어. 무전 끊는다.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 아는 브라이트로서는 아무로,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뭘 하려고! 소리쳐 부르기도 애매했을 터다. 지금은 죽고 없는 퀘스 파라야라는 소녀가 어느 날 날카롭게도 외친 아무로, 당신은 좀 교활해요! 말이 마음을 묵묵히 눌렀다. 그래, 나는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네. 사실 많이 그럴지도, 허나 그런 감상을 느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급작스레 달겨들어 제 기체 한가운데를 찌르려하는 팔을 방패로 막은 다음 서둘러 몸을 빼 빔 샤벨을 휘둘렀다. 기량이 많이 회복됐다고는 하나 아직 강화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몸조차 완벽하지 않을 샤아가 제 공격을 완벽히 틀어막기란 흡사 별 따기와도 같았다. 윽!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비틀대는 샤아한테서 눈을 떼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샤아나 네오지온이 다녀간 듯 다 부서져 폐허가 된 보급기지가 보여 옳다구나 쾌재를 불렀다. 육탄전을 하기에는 저기만한 곳이 없군, 자리를 옮겨야겠는데. 제가 먼저 자리를 뜰 경우 때는 지금이다 얼른 퇴각 명령을 내릴 네오지온 상층부 인간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슬슬 유인하기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아무로, 아무로 레이! 아아, 아...! 머리가 아픈지 고통스레 외치는 그 모습이 괴로워 기다려, 기다려 샤아. 도와줄게, 도와줄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대로 있다간 저까지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수차례 합을 겨룬 끝에야 겨우 목적지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지금이지, 재빨리 무기를 휘둘러 샤아가 탄 기체 팔을 잘라내자 아...! 탄식 같은 비명이 올랐다. 자, 샤아. 얼른 내려, 얼른 내려. 내가 쫓아갈 테니까, 이번에도 쫓아가줄 테니까 제발 내려. 너한테 지금 방법은 육탄전뿐이 없잖아, 안 그래?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지금...! 관료놈들 너희는 뭘 할 수 있고! 그 간절한 바람이 통했는지 벌컥 열린 콕핏 안에서 노멀 수츠 차림으로 뛰어내려 폐허 속으로 숨어들어 가는 샤아를 다급히 쫓았다. 어쩜 우주를 떠도는 라라아 슨이 도와준 지도 몰랐다, 그녀 역시 샤아 아즈나블이 자신을 잊도록 두고 볼 사람이 아니었다. 라라아, 부디 나를 도와줘...! 그 선연한 이름을 소리내기는 새삼 오랜만이었다. 2차 네오지온 항쟁이 끝난 후로는 다신 부를 일 없을 줄 알았건만 이렇게 재차 꺼내게 되다니 세상 일 참 모르겠다 생각하며 총을 꺼냈다. 구세기가 지나 우주세기가 되었다지만 육탄전 방면은 그렇게 발전하지 않은지라 아직도 가장 널리 쓰이는 무기는 총과 단도였다. 인간 몸 구조도 그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만큼 먹히는 무기가 같은 것도 그닥 놀랄 거리는 아니었다. 조용히 숨을 몰아쉬고는 몸을 숙였다. 브라이트가 신신당부한 얘기가 떠올랐다. 강화인간들은 힘이 세! 샤아도 분명 그렇게 강화됐을 거야, 조심하라고! 육탄전은 최대한 피해! 허나 자신은 결국 호랑이굴을 직접 찾았다. 정말 학습능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자조하면서도 후회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혹여 어둠 사이서 갈비뼈를 걷어차일까 몸을 굽힌 채 조심조심 주변을 살피다 재빨리 너른 공터 쪽으로 향했다. 이태까지 한 경험들을 반면교사 삼아보자면 좁은 복도보담 차라리 턱 트여 사각이 없는 곳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편이 훨 나았다. 내가 신장과 체중이 딸리니까 말이지, 이제는 힘이나 체력도 밀릴 테고. 약점은 최소한 줄여두는 편이 좋아, 싸울 태세를 갖춘 다음 주변을 둘러보는 시야 가 즈음 무언가 들어와 몸을 낮췄다. 아무로 레이... 아직 산소가 남은 곳이라서인지 헬멧은 벗은 채였다. 순간 숨통이 콱 막혔다.
꼭 크와트로 버지나 같았다.
물결쳐 흐르는 별빛 긴 머리칼과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 갸름한 턱 선이며 유려한 체형까지 그가 아닐 수 없어 저도 모르게 크와트로야? 물어버렸다. 크와트로? 아아, 그런 이름도 있었다는군. 그런데 아무로 레이 네가 그걸 어찌 알지? 내 적이어서? 총을 빼드는 모습을 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니, 나는... 아니야. 아니야 샤아. 아무것도. 찰나 샤아가 이상한 낯을 했다. 곧 평소 그 무심한 표정을 덧씌우긴 했으나 잠깐 보인 감정은 분명 의아함이었다. 아무로 레이, 너는 이상하다. 너에게서는 어떤 악의도 살의도 느껴지지 않아. 왜인가? 나는 널 정말 죽이고 싶은데. 내가 위협이 되지 않아서인가? 겉잡지 못할 웃음이 터져 하하, 하하하! 위협이 안 된다고? 헬멧을 벗어던졌다. 깡,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너만한 위협이 내 인생에 또 어디 있는데.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샤아, 저도 모르게 이를 으득 갈고는 한 발짝 내딛자 다가오지 마, 총을 가슴께 부근까지 들어올렸다. 다가오지 마, 지금 너... 기분 나빠. 그 말투만은 예전과 똑같아 너도 너긴 하구나, 총을 마주 댔다. 기분 나빠, 꺼지지 못해 아무로 레이?! 상대가 총을 발포하기 무섭게 얼른 몸을 숙여 들어가 허리를 잡고는 거의 패대기치듯 누르자 의외로 쉽게 넘어갔다. 어라, 버티는 힘도 셀 줄 알았는데... 전력을 쏟았음을 감안해도 너무 쉽게 넘어간 듯해 너, 허리힘 약해? 물으니 힘이 셀 이유는 뭐 있지? 파일럿은 MS만 잘 다뤄도 된다, 인상을 찌푸렸다. 아, 그럼 힘은 강화시키지 않았나. 그럼 얘기가 훨씬 쉬워진다, 아마 네오지온 상층부 인사들은 이런 돌발 사태까지는 감안하지 않은 모양이라 마릇한 손목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샤아, 말을 이으려는데 입가 양쪽으로 동그랗게 난 생채기가 보였다. 어째 심상치 않다 싶어 이거 웬 상처야? 누가 때렸어? 물은 순간 너랑은 섹스 안 한다, 아무로 레이. 괜한 수작 걸지 마, 분 섞인 경고가 올랐다. 머릿속이 삐이, 울렸다.
섹스?
그래, 섹스. 너랑은 안 해. 너는 내가 없애야할 내 적이고... 연기처럼 뿌옇게 머리를 채우는 소리 속에서도 그 파르란 눈만큼은 선연히 보였다. 미간 사이 비스듬히 세워 난 흉터와 보기 좋을 만큼만 높은 콧날, 살짝 흐트러져 이마를 가린 별빛 머리카락마저도 예전 그대로건만 하는 말만이 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는... 기분이 나빠. 그래서 아무로 레이 너랑은 섹스하지 않을 거다. 마침내 속이 폭발했다. 너 지금 뭐라 그랬어? 나랑은 섹스하지 않는다고? 그럼 다른 사람들과는 한다는 얘기인가? 주눅 들었는지 주춤 물러선 멱살을 잡아당겨 대답해, 내가 물었어! 소리를 높이니 마스터와는 하지! 당연한 거 아닌가? 짜증 섞인 답이 돌았다. 내가 그럼 누구랑 섹스 할 것 같아? 더 볼 것은 없었다. 뺨을 퍽, 소리 나게 후려쳐 방어태세를 해제시키고 노멀수츠 목깃을 뜯어낼 듯 잡은 손목을 더듬더듬 감싼 샤아가 잠, 잠깐만. 아무로 레이, 잠깐만!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서는 못한다! 네가 이렇게 나를 원하는 줄은 몰랐군, 하지만 여기서는 못해. 노멀수츠를 벗을 수도 없고 산소도 희박하다. 여기서 하는 건 자살 시도나 마찬가지야. 동반자살이라도 원하나? 나는 싫은데 어쩌지? 그렇게 원할 경우 한 번 쯤은 해줄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아나? 아, 그것보다 좀 내려가 주지 않겠나? 아무로 레이. 구역질나거든, 짜증나고. 네가 날 그렇게 쳐다볼 때마다 머리가 아프다. 두통이 나서 못 견디겠어, 아주 진절머리 나는 감각이다. 내려가는 대신 방금 전 친 부분을 한 번 더 주먹 쥐어 내리쳤다. 아, 좀! 적당히 하지 그러나! 왜 이리 나에게 집착하지?! 무릎을 올려 명치 부근을 거의 찍듯이 쳐 밀어내고는 겨우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을 보다 푸,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착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열다섯 처음 만난 시절부터 제 별이자 인생의 유일한 색이었던 샤아를 지금껏 계속 쫓아온 이유는 한낱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집착이라기에는 너무도 애틋하고 절절했다, 인간 본질과 가까운 느낌이라 해도 좋았다. 때때로 사람들은 아무로더러 너무 냉정하다, 기계만 보다 미친 것 같다, 어릴 적 부모님을 잃어서 그런지 지나치게 공감을 못한다는 빈정거림 섞인 조언을 줬는데 대체로 동의하기 힘들었다. 물론 그 중에는 새겨 들어야할 만한 얘기들도 있기는 했다. 사람과 대화할 적에는 집중을 해야 한다거나 식사 자리에까지 기계를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충고들 정도는 받아들일 만했다. 허나 인간으로서 응당 가져야할 감정이 전혀 없다는 만큼은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도 안됐다. 설령 그 화살이 단 한 사람한테만 집중돼있다 해도 어쨌든 있기는 있는 셈인지라 그런 소문을 들을 때면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헛소리야, 냉정히 잘랐었다.
그런데 어째서 너는 나를 잊었지?
어째서 나를 잊었지?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너는 어째서 나를 잊었는가, 감히. 나는 이렇게나 너를 생생히 기억하는데, 아직도 너를 쫓는데, 어째서 너는, 나를 잊고, 그렇게. 총은 필요도 없었다. 8년쯤 전 어느 날 브라이트에게서 더블제타 건담을 몰았다는 파일럿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쥬도 아시타랬지, 뛰어난 뉴타입 능력을 지녀 그 하만 칸을 단지 프레셔로만 압박했댔다. 그녀도 뛰어난 뉴타입이었으니만큼 곧 회복하기는 했으나 한동안은 컨디션 조절조차 잘 못했다 했다. 연방 고위놈들은 그런 데만 집중을 하니까 뉴타입들을 병기로밖에는 써먹지 못하는 거지... 어찌 봐서는 불쌍하기도 해. 불쌍함과 타당함은 전혀 다른 문제지만 말이야, 그리 말하며 브라이트가 어찌나 씁쓸하게 웃었는지 아무로는 아마 폭사할 때에도 저 어조만큼은 잊지 못하리라고 내심 생각했었다.
어쩜 연방은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게 아닐까.
평화로 침묵을 이룩하기에는 인류가 너무 멀리 와버렸다, 새하얗게 질려 바들바들 떨다 결국 무릎을 꿇어버린 샤아를 응시하다 힘들어? 천천히 마주 앉은 순간 우욱, 구역질이 터졌다. 저리 가, 저리 가라 아무로 레이...! 계속 속만 게워내는 그 등을 끌어당겨 나랑 같이 가자, 조용히 말했다. 이러나저러나 넌 아플 거야, 비인도적인 대우를 받겠지. 그럴 바에야 지금 나랑 같이 가서 새 삶을 찾아보는 쪽이 훨씬 나아. 나는 적어도 너를 샤아로서 대접해줄 테니까. 너를 샤아 아즈나블 그 자체로 대해줄게. 그러니까 나와 함께 가자, 잘해줄게. 제 프레셔에 겁먹어 속까지 게우는 사람에게 할 만한 제안은 아니었지만 저로서는 최선이었다. 싫어, 싫어. 너와는 같이 안 갈 거다, 절대 같이 안 가...! 어째서 너와 가야, 우욱...! 해...! 채 소화되지 않은 것은 다 게웠는지 이제는 순 샛노란 위액뿐이었다. 목 상하거든, 너무 그러지 마. 어깨를 끌어안아 천천히 일어선 귓가를 싫어, 싫어 넌 내 적이야. 넌 내 적이잖나, 아무로 레이. 널 죽여야 해! 널 죽여야 한다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후볐다. 아무로 레이! 거의 발작하듯 발버둥치기에 밧줄마냥 팔을 둘러막았다. 여기서 나가야 해, 기체까지 거리가 얼마 정도지... 내 헬멧은 샤아에게 줘야겠고, 이 녀석 헬멧을 어디 두고 온 거야? 부서졌나? 바닥을 구르는 헬멧을 주워 몸부림치는 머리통에 꽉 끼우듯 씌운 다음 서둘러 기체 쪽으로 가자 그제야 전투 상황이 보였다. 아비규환이었다, 네오지온 쪽도 이판사판인지 소규모 전쟁이라 불러도 될 만치 판이 커졌다. 쉼 없이 헛구역질하는 샤아를 먼저 태우고는 콕핏 문을 닫고 조종간을 잡았다. 싫다! 날 돌려보내 줘, 아무로 레이! 네 프레셔는 정말 기분 나쁘다...! 우는 소리는 들은 체 만 체하며 브라이트, 아무로 레이다! 샤아 아즈나블을 잡았다, 지금부터는 내가 출격한다! 전선 재정비시켜! 내가 선봉을 맡겠다, 기체 이상 없음! 무전을 날리니 곧바로 알았다! 서둘러 복귀해라, 아무로! 엄중한 답이 떨어졌다. 정신이 반쯤 날아가 눈 깜빡했다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애가 바로 샤아니만큼 돌아가는 중에도 쭉 지켜봐야한다 생각해 고민 없이 무릎을 내주었다. 두 팔 사이 가둬두면 설사 위험한 행각을 벌인다 해도 금방 막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싫다, 싫어! 아무로 레이, 죽여 버리겠다! 나를 놔줘! 몸을 돌려 목을 조르려 해서 좀 가만히 있어라! 있는 힘껏 박치기를 날렸다. 윽...! 역시 한 번 약해졌다 겨우 회복한 탓인지 이런 공격에도 쉬이 무너졌다. 조금 헐거워진 노멀수츠 목깃 아래로 벌건 잇자국 여러 개가 비쳤다. 간신히 유지하던 평정이 완전히 무너졌다.
누가 감히 내 샤아를 건드렸지?
내 건데, 잃어버렸더라도 곧 내가 찾아갔을 내 건데 감히 어느 누가? 어떤 놈이? 내 샤아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알았어? 샤아는 내 거야, 언제나 내 거였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그런데 누가 감히? 축 늘어져 힘없이 흔들리는 몸을 바싹 추켜 안고는 조종간을 더 강하게 붙잡았다. 가만 안 둬, 샤아를 이렇게 만든 놈들은 내가 반드시 죽인다. 치열한 공격이 오가는 한복판으로 나가 당장 판넬을 전개하니 아무로 레이? 아무로 레이인가?! 적들은 당황해 허둥지둥한 반면 아군 측에서는 소령님! 아무로 소령님이시다! 각자 맡은 바를 다해라! 환호성과 다음 지시가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허나 아무로는 전혀 고취되지 않았다. 내가 정말로 가만 안 둘 거야, 네오지온 잔당 놈들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처음 전장을 밟은 열다섯 그 어느 날처럼 미친 듯 버튼을 누르고 조종간을 당겨 적들을 날렸다. 아주 약간의 자비조차 베풀어주지 않아 상대로서는 도망간다는 선택지밖에는 선택할 수가 없었다. 아군마저도 텐션을 완전히 따라오지는 못하여 완벽히 보조하기는 포기한 듯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전쟁은 늘 그랬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혼자가 됐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은 없지, 살이 빠졌는지 보기와는 달리 그닥 무겁지 않은 목덜미에 코를 묻어 냄새를 맡았다. 아, 샤아 냄새다. 에우고 시절 몇 번이고 맡은 향이다, 마음 한 켠이 묵직해져 입술을 씹었다.
샤아는 내 건데, 아무한테도 못 주는 내 건데.
목덜미를 완전히 덮은 별빛 머리카락을 한 번 부드럽게 쓸은 손을 옮겨 다시 조종간을 잡았다. 2차 네오지온 항쟁이 끝나고서부터는 전의를 상실한 상대만큼은 그냥 보내주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등까지 보이며 도망가는 적기까지도 정확히 맞춰 폭발시키고서야 무기를 내렸다. 식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별 움직이는 소리도 들릴 마냥 고요해진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아무로는 다들 수고했어, 고생 많았다. 대규모 작전은 이게 끝일 것 같다, 간단한 인사말만 남기고는 먼저 움직여 함으로 향했다. 아무로 소령님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얼빠진 목소리들이 건넨 인사를 들으면서도 그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이따 장비를 벗으면서 아무로 레이 소령이 냉혈한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감상이나 서로들 주고받겠지, 그런 부정적인 감상만이 들어 휴우, 짧게 머리를 털었다. 샤아가 없는 전장은 모든 게 지극히도 순조로울 뿐더러 단조로워 식은땀은커녕 그냥 일반적인 땀조차도 흐르지 않았다.
현실공상
-CCA 이후 살아남은 아무로와 꿈과 현실을 전복시킨 샤아 얘기 / 19세 미만 구독불가
안녕, 아무로. 오늘도 너인가? 이렇게 매일같이 내 얼굴 보는 게 지긋지긋하지도 않나? 난 그런데 넌 아닌가봐,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어조를 듣고도 인상은 풀리지 않는다. 대답하는 대신 끼익, 시끄러운 소리 나도록 거칠게 의자를 빼 앉으니 그런 태도는 좋지 않아, 네 집이잖나? 고개를 기울인다. 반쯤 감긴 꺼풀아래 도사린 눈은 영민한 푸른빛이다.
비록 꿈일지라도.
입술 안쪽 연한 살을 꽉 깨문 그대로 손바닥 깊이 손톱을 박았다. 어쨌든 여기는 네 집이야, 실제로 네가 이런 곳에서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늘 여기 있잖아, 그렇지? 그럼 네 집인 거야. 꼭 돌다리라도 두드리듯 한 음 한 음 짚어 명확히 발음하고는 또 꺼풀 내려 웃는다. 에우고 시절에나 본 부드러운 웃음이라 정말 꿈인 것 같아? 오늘도? 눈썹을 일그렸다. 응, 꿈이지. 아무로 네가 매일 나오잖아. 그럴 수는 없거든, 날 증오하는 네가 나와 이렇게 오래 있을 리는 없어. 샤아는 어느 순간에도 부정하지 않는다, 의심하지 않는다. 이미 제 꾀를 받아들여버린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아무로는 그 말간 얼굴을 주먹 쥔 채 고요히 바라본다. 그렇군, 오늘도 꿈이로군. 알았어. 부르쥔 살덩이 아래로 먹먹한 통증이 스몄으나 짐짓 느끼지 못한 척 일어섰다. 계속 여기 있을 건가, 샤아? 부드러이 내리 감긴 얇은 꺼풀 아래서 어떤 생각이 노니는 중일지는 우주에서 가장 강한 뉴타입이라 불리는 아무로 레이조차도 모른다. 아무로는 샤아를 꿰뚫지 못한다. 1년 전쟁 시절서부터 그랬다. 물론 이론으로야 억지로 열기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지만 무리하게 파고 들려 할 경우 분명 미친 듯 반항하다 스스로를 부숴버릴 터였으므로 과격한 방법은 이미 단념한 지 오래였다. 아, 돌아가야지. 오늘은 얼마나 더 있게 될는지 모르겠지만서도 여하튼 곧 깰 거야. 단언하는 마른 입술을 물끄럼 응시하다 그래, 알았어. 네 맘대로 해, 천천히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금빛 머리통이 괴로워 몇 번 마른세수했다.
샤아 아즈나블은 꿈을 먹어버렸다.
먹히지 않았다, 먹은 것이다.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분명 처음 떨어졌을 적에는 저렇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다친 것 치고는 의식도 의사도 지나치게 명료해 다루는 데 애를 먹었다. 어느 순간 꿈과 현실을 전복시켜버렸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저런 참담한 몰골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그를 더 쳐다보기보다는 누덕누덕해진 일기장을 꺼내 날짜를 체크하는 쪽을 택했다. 언제부터 저랬더라, 몇 십 장을 거슬러서야 샤아가 이상해졌음을 자각한 첫 날을 찾았다. 2년하고도 다섯 달 삼 주 전이었다.
제 2차 네오지온 항쟁이 연방 측 승리로 끝났다는 사실은 종전선언이 떨어진 지 이틀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나마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더라면 듣지 못했을 터다. 지구도, 스위트워터도 아닌 어느 외딴 콜로니에서 눈을 뜬 아무로는 빛을 보기가 무섭게 샤아를 찾았다. 샤아, 샤아 어디 있어?! 살아있어?! 분명 엑시즈가 완전히 부서지기 전 빼서 단단히 안았으므로 주변 어디엔가에는 확실히 있으리라 믿었다. 뉴건담이 아주 망가지지는 않았으니만큼 비상탈출 콕핏을 사용한 샤아 역시 무사할 확률이 높았다, 본디 인간과 밀접한 부분을 가장 강하게 만드는 법이었다. 특히 비상탈출 콕핏 같은 경우 말 그대로 우주 사출용이므로 보통은 더욱 견고하게 제작했다. 샤아, 샤아? 시큰시큰 아린 발목을 움직여 사방을 뒤지다간 얼마 떨어지지 않은 데서 생명이 움직이는 기색을 느끼자마자 자리를 박찼다. 이 날카로운 느낌은 샤아다, 걔일 뿐이 없다. 헐떡헐떡 목 막는 숨 덩어리를 간신히 토하며 급히 콘크리트 바닥을 가로질렀다. 이 정도 덩치가 떨어졌는데도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걸로 보건대 버려진 콜로니라는 거겠지, 도심과 엄청 떨어져있든가. 철골 사이 놓인 빨간 덩어리를 볼 순간 시야가 훅 돌았다. 여기저기가 우그러들어 비루했으나 다행히 뚫린 부분은 없는 것 같아 무작정 손부터 대봤다. 샤아, 살아있지? 얼마나 심하게 다쳤을는지는 몰라도 제가 감지할 만한 신호를 보냈다는 얘기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두들겨 맞은 마냥 움푹 파인 문짝을 짚은 다음 1년 전쟁시절처럼 느릿히 강제 개방했다. 비릿한 냄새가 풍겨 젠장, 인상을 찡그렸다. 한쪽 팔꿈치가 나갔는지 움직일 때마다 저미는 듯한 통증이 스쳤다. 간신히 출입구 문턱을 디뎌 내부를 살폈다. 실로 아수라장이었다, 피 튀겨 시뻘겋게 물든 동그란 벽면과 다 부서져 걸레짝이 된 파일럿수츠, 얼룩덜룩한 덩어리 엉긴 얼굴까지 어느 하나 제대로 원형을 유지한 게 없어 입술을 꽉 물었다. 남들은 아무로 레이도 멀쩡해보이지는 않는다 지적할 게 분명했지만 샤아는 그 이상이었다. 미세히 전해져오는 신호가 아니었을 경우 죽었다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샤아, 손가락은커녕 꺼풀조차도 움직이지 못하는 몸 가까이 다가가 샤아, 살아있는 거지? 맞지? 코밑을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숨이 아직 붙어있음을 확인하고서야 피투성이가 된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넣어서 겨우 안아들었다. 자꾸 까닥까닥 목이 넘어가 손을 옮겨 받치니 아무로, ...인가...? 다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하려 입을 연 순간 무릎 부근이 수백 조각난 듯 아파와 이를 콱 악물었다. 떨어질 때 부딪혔나, 기계가 아니니만큼 간단히 손을 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응, 나야. 아무로 레이다, 그저 식은땀만 줄줄 흘리며 걸었다. 콘크리트 바닥이라서인지 푹푹 파이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왜 네, 가, 여기... 금방이라도 꺼질 마냥 힉힉대는 목소리를 막기도 애매해 인상만 찡그렸다. 말을 막을 시 정신을 놓쳐 까무룩 잠들었다 죽을 확률도 있었다. 우리 살았어, 샤아.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어. 깨보니까 여기였어. 나도 모르니까 다른 주제 좀 꺼내봐. 우리가 왜 이렇게 된 것 같냐던가, 뭐 그런 것들. 좋지 않은 화제임은 누구보담 잘 알아도 달리 공통 관심사가 없었으므로 서투르게나마 돌릴 밖에는 없었다. 아예 입을 다물려나, 미간을 찡그린 찰나 샤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핏덩어리가 엉겼는데도 여전히 기이하게 아름다웠다.
관심 없어, ...당장, 날, 내려놔.
당장 날 내려, 놔, 아무로. 나, 는, ...살 마음, 없, 으니까. 알았, 어? 띄엄띄엄 말을 끊으면서도 끝끝내 살지는 않겠다 선언한 그 입술이 짜증나 나는 너 살릴 건데, 이를 악물었다. 절대 죽이지 않을 거야, 알았어? 만약 샤아가 제정신이었을 경우 제 무릎 꼴을 보고는 다 부서져 움직이지도 않는 다리로 말만 번드르르하게 잘 한다 신랄히 비웃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 당시에는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할 상태였다. 웃기지, 마. 나는, 더, 살, ...마음, ... 없다고...! 라라, 아도, 죽, 었고, 몸도 이, 꼴이, .. 핏방울 섞인 기침을 토하고는 다급히 몸 웅크린 귓가로 입 다물라고, 샤아. 더 말했다간 진짜 죽어, 짐승울음 같은 소리를 흘린 아무로에게 박힌 시선은 여전히 시퍼랬다. 그 날카로운 눈길이 힘을 뺏어가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이를 드러낸 순간 차, 라리, 그게, 낫다고, 독 어린 말이 날아왔다. 내가, 살기를, 원하, 는 것, 같, 아? 말, 했지... 죽, 고싶, 다고...! 내장이라도 다쳤는지 계속 피 묻은 숨만 콜록대는 몸뚱어리를 꽉 끌어안은 그대로 서둘러 사람을 찾았다. 부서진 무릎이 뼈 갈리는 고통을 호소해도 지금은 절대 무너지지 못한다는 각오를 다져 꾸역꾸역 걸었다. 아무, 로, 날, 버, 려... 음절마다 묻은 피비린내를 닦아줄 방도가 없다는 사실이 그다지도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내가 널 왜 버려. 관절이 어긋난 팔은 이미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저 또한 반 죽은 시체나 마찬가지라 자조하다 품 깊이 안긴 시뻘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기이하다 생각했다. 죽어가는 사람은 필경 추레해야 맞건만 그 말간 낯은 조금 수척해졌을 뿐 다른 부분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거니와 오히려 위태로운 아름다움은 늘어난 듯했다. 한껏 인상을 찡그려도 추함은커녕 섬세한 예민함만이 부각됐다. 잘못 건드릴 시 쨍강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스르르 부서져버리는 자기인형과도 같은 사내라 몰래 혀를 내둘렀다. 이 고아함으로 몇 명을 부쉈던가, 아무로가 아는 한에서도 열 손가락을 훌쩍 넘어갔다. 발가락까지 동원하더라도 수를 세기에는 역부족일 게 확연해서 입 꾹 다문 그대로 묵묵히 걷기만 했다. 아무로, 아무, 로... 제발. 어둑한 건물 틈새로 가끔 들이치는 빛을 받아 미약하게 반짝이는 발간 액체는 새로 흘린 피일 성 싶었다. 샤아, 제대로 숨 쉬어. 너 그냥 죽게는 못 놔두니까. 이제는 제대로 움직이지 조차 않는 무릎을 발 한 번 굴러 접붙이고는 다시 다리를 끌었다. 일정시간이 지나면 고통도 무감각이라는 영역에 들어선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 순간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다리 한 짝 정도야 불구가 되더라도 상관없으나 한 번 떠나간 이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평생 군인으로서 살아온 아무로는 너무도 잘 알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나머지 계속 졸음을 호소하는 입술을 조금만 더 참아, 단호히 막았다. 지금 잠들었다간 너 죽어. 알아? 노성 아래서 터진 감정은 웃음이었다, 한 쪽 눈만을 치켜 뜬 샤아가 아무로, 고개 젖혀 감정을 흘렸다. 말, 했지! 나, 는, 제발, 죽고, 싶다, 고. 죽고 싶다는 발음만이 지나치게 명료해서 입술 안쪽 연한 살을 깨물었다. 만약 샤아가 온전한 상태였을 경우 아 그래? 알았어, 네 맘대로 해. 어디 한 번 죽어보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게 했다간 정말 목숨을 잃을 터였으므로 입 꾹 다문 채 걸을 뿐이 없었다. 아, 무로. 이, 제, 제발, 날, 버려... 들을 가치도 없다 계속 되뇌며 무작정 길을 찾았다.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곳에서 방향을 가늠하다보니 자꾸 발이 채였다. 한 쪽 무릎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 탓도 있었겠으나 그 당시에는 다급함이 앞서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젠장! 결국 화를 터뜨린 아무로를 물끄럼 쳐다보던 샤아가 둘이, 서, 같이, ... 죽자는, 건, 가? 응? 그렇, 게, ... 어리석은, 사내였, 어? 피를 한 됫박 토했다. 기침을 하기는커녕 호흡조차 가다듬지 못해 꺽꺽대기만 하는 목을 받쳐 안은 그대로 달음박질쳤다. 내상을 입은 환자는 상태유지가 중요하니만큼 절대 격하게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수백 번은 더 들었는데도 몸부터 나갔다. 바, 보가, 아니었, 잖아... 그, 렇게, 이성, 적이었, 으면서... 무릎이 뼛조각과 함께 비명을 흩뿌려도 멈추는 대신 속력을 높였다. 거대한 폐허를 빠져나와서야 이곳이 아주 버려진 콜로니는 아님을 알았다, 검푸른 연기를 뿜는 공장 굴뚝들과 깜박깜박 지나다니는 차 전조등들을 보건대 확실히 생명이 존재했다. 여긴 그럼 공업지대인가, 뉴건담이 지면과 부딪히며 틀림없이 굉음이 났을 텐데도 왜 다들 와보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어디 공장 기계가 낸 소음이리라 어림짐작했을 게 분명하거니와 너무 외진 데 있어 잘 들리지도 않았을 터다. 보통은 아무도 폐허를 신경 쓰지 않는다, 아무로는 힘없이 숨을 훔치는 샤아를 끌어안은 그대로 한 발짝 더 내딛었다. 멍, 청한, 짓거리는, 그만 둬, 아무로... 자꾸 발목이 흐물텅 꺾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기실 그럴 정신도 없었다, 고통 역시 여유가 있어야 표현할 수 있는 감각이라는 깨달음은 그날 얻었다. 이제, 그만, 하자... 독이 어렸어도 방금 전보담 한 풀 꺾여 작아진 목소리가 자꾸 머리를 죄는 것 같아 시뻘겋게 범벅된 얼굴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무작정 걸었다. 분명 이 끝에는 커다란 도로가 있음을 알았으므로 이동하다 까무러치나 그냥 앉아있다가 기력이 다하여 죽나 비슷하다 생각했다. 기실 사람이 있는 곳이 보임에도 구조자가 오길 마냥 기다리기는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게다가 분명 저보담 더 크게 다친 샤아가 훨씬 먼저 죽을진대 그 꼴만은 못봤다. 30년 남짓 살아오는 내내 샤아 아즈나블이라는 인간을 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렴풋이라도 생각하지 않은 날도 존재치 않았다. 샤아 아즈나블은 실로 제 인생을 끄는 사이렌과도 같은 것이었다, 저를 절벽으로 밀친 괴물이었다. 이제 와 사라지게 놔두기는 싫어 주먹을 꽉 쥔 그대로 다리를 끌었다.
나 역시 네게 괴물이었다면 끝까지 그래야 했다.
죽게 해 달라 읍소해도 들어주지 않는다, 제 의견만 밀어붙인다. 샤아가 절망하더라도 제 욕구를 채우기 위해 그를 붙잡아야한다. 샤아 아즈나블에게 아무로 레이란 그런 지독한 인간일 터였으므로 고민조차도 하지 않았다. 샤아, 넌 살아야 해. 내가 원하니까. 샤아는 고통스레 신음했다. 이런, 몸으로? 이, 제는, MS도, 못, 탈, 거고, ... 겨, 우, 너, 때문, 에? 내, 가? 금방이라도 발버둥 칠 듯 거칠게 말을 짓씹는 모습을 내려다보다 그래, 역시 소리를 씹었다. 그래, 나 때문에라도 살아야지.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날 혼자 놔두고 갈 생각이었나? 자꾸 훌떡훌떡 꺾이는 무릎을 억지로 힘줘 일으켜 세운 다음 미친 듯 움직여 결국 차 수십 대가 지나다니는 커다란 도로를 찾아냈다. 흡사 검은 바다를 건너는 물고기 떼들 같았다. 아무, 로... 질렸다는 양 미간을 찌푸린 샤아를 보지도 않은 채 혼자 편해질 수 있을 줄 알았어, 샤아? 정교한 획을 떨어뜨렸다.
너든 나든 한 쪽이 살아있는 이상 그럴 수는 없지.
네가 있는 이상 난 죽지 못해. 우린 지금 서로를 붙들어둔 거야. 바듯 안긴 몸이 바들바들 떠는 게 느껴졌으나 자존심을 해치는 짓은 하지 않는 편이 피차 좋다고 생각해 내려다보지 않았다, 제 인생이나 다름없는 남자가 형편없이 무너져 우는 꼴 따위 보기 싫기도 했다. 만약 안긴 이가 세이라 마스나 벨토치카 이르마, 혹은 첸 아기였다면야 성심껏 달래줬겠지만서도 샤아만큼은 처지를 봐줄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아무로, 푹 젖어 절망 토로하는 목소리를 무시하고는 도와줄 사람을 찾았다.
아무로,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나.
품이 흠뻑 젖어들었다, 그제야 고개를 내려 상태를 체크했다. 말을 끝낼 때마다 왈칵왈칵 피 토하는 모습을 보자니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닌 것 같아 샤아, 샤아. 정신 차려! 불과 몇 십 분 새 해쓱해진 볼을 툭툭 쳤다. 아무로, ...날, 죽여줘.... 힘이 다한 나머지 미처 들이키지 못한 반 토막 숨만을 채 정신을 놓아버린 몸을 꽉 끌어안은 그대로 급히 차를 불렀다. 피투성이어서인지 택시조차도 좀처럼 서지 않았지만 전쟁터에도 있는 구원이 일반 콜로니에라고 없을 리는 없었다. 곧 트럭 하나가 반응을 보였다. 갓길을 찾아 조심스레 멈춰선 덤프트럭 앞좌석 문을 열어 내린 남자는 털모자를 쓴 거한이었는데 울룩불룩한 팔 근육과 옷 여기저기 묻은 기름때, 가죽이 군데군데 붙은 장갑을 봐서는 아마 정비공이나 공장인부인 듯했다. 어서 타요, 형씨들! 거 엄청 다쳤구만. 혹여 저희 인상을 알아채 어디 신고라도 할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듯했다. 그 형씨는 내가 옮겨줄게요, 형씨는 먼저 타쇼. 과연 여기저기 다친 저보다는 우락부락 건장한 남자 쪽이 힘이 좋아서 금세 차를 출발시킬 수 있었다. 병원 가려는 거죠? 병원은 여기서 15분 쯤 떨어진 데 있어요, 좀 큰 병원 찾는 거잖소. 안 그래요? 정확히 원한 얘기인지라 그렇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당장 가야합니다, 고개를 숙였다. 욱신욱신 고통 흘리는 무릎을 한 쪽 손바닥 펼쳐 감싸고는 다른 쪽 팔로 샤아를 끌어안았다. 크게 다쳤네요, 낙오자인가? 아님 부상병? 낙오자라는 말을 안 좋게 듣지는 마시오, 여기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오거든요. 떨어지기도 많이 떨어지고 오기도 많이 오고. 용케 아직 구멍은 안 났죠. 핸들을 쥔 손을 익숙하니 돌려 방향을 잡은 남자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부상병들이 많이 온다는 말입니다, 아예 여기 정착한 사람들도 수 없어요. 아주 많지. 자기 과거를 숨긴 채 사는 사람들이 인구 한 4분지 1은 될 걸요. 돌아갈 곳이 없다면 당신들도 그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겠소. 그냥 상태 체크를 위함이었던 듯 다시 고개를 똑바로 해 앞을 보았다. 조금 긴 데다 끝이 갈라진 손톱 밑에는 무척 익숙한 기름때가 끼어있었다. 10대 시절에는 제 손톱도 그랬었으므로 괜히 친밀감이 들은 나머지 정비공이십니까?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뿔싸, 입술을 깨물기도 잠시 맞는데 어떻게 알았소? 형씨 기계 잘 압니까? 긍정적인 답변을 듣자 가슴이 바듯해졌다. 네, 군인이 되기 전에는 기계를 만졌거든요. 지금도 가끔 만집니다. 고작 15분여뿐이 같이 가지 못하지만서도 말동무가 생겨서인지 거한은 크게 기뻐했다. 요즘은 다들 기계를 안 만지려 하니까요, 자동차나 MS 쪽이 아닐 경우 사실 이제는 망가지면 새로 사는 게 빠르기도 하고. 워낙 자동화됐잖소, 이 구역이. 아, 형씨는 이 구역 처음인가? 어디 떨어졌소? 저 자동화구역 저편이었을까? 그렇다하니 그 쪽은 사람들이 잘 안 가지, 여기까지 오느라도 힘들었겠습니다. 아무래도 자동화 공장 지대는 으스스하니까, 코밑을 점령한 갈색 수염을 쓸었다. 기계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사람이 필요 없는 지대란 으스스하죠. 오히려 생명체를 불청객으로 여기는 분위기라니까요. 인간은커녕 동물조차도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요. 형씨도 지나와봐서 알죠?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샤아를 끌어안은 그대로 허리만 숙여 방금 전 본 광경을 되새겼다. 거대하게 오른 철골 숲과 두터이 하늘을 덧씌운 검회색 연기, 창백히 늘어선 연회색 벽들까지 너무도 인공적이어서 오히려 인간이 손대지 않은 듯한 곳이었다. 끼릭끼릭 돌아가던 기계소리가 아즉 선했다. 한때는 거기에도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냥 자동화시키는 쪽이 더 싸게 먹혀서 아예 시스템 자체를 바꿔버렸소. 저 꼴이 나기도 식간이었습디다. 짐짓 애석하다는 투여도 기실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왜일까, 일자리를 잃어서일까. 옛 연인 벨토치카였을 경우 호기심을 참지 못하여 왜 그러냐, 기계한테 일감이라도 뺏겼냐 캐물었을 테지만 기본적으로 남을 궁금해 하지 않는 유형인 아무로가 그럴 리는 만무했다. 달리 말하길 원하지 않는 듯해서도 그랬다. 조개처럼 입 닫은 이를 억지로 열어 그 속내를 들어봐야 둘 다 다치기만 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경험해 너무도 잘 알았다. 특히 뉴타입은 다른 사람과 쉬이 교감 하니만큼 언제 불쑥 무언가가 쳐들어와 정신을 교란시킬지 몰라 더 조심해야했다. 특히 지금은 정신도 유지 못할 만치 다친 샤아가 있어 더 몸을 사릴 뿐이 없었다. 별로 유쾌한 기억은 아닌 듯 여기서 주변 도로로 빠질 겁니다, 형씨. 혹시 놀랄까봐, 서둘러 화제를 돌린 남자를 따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스물두 살 시절까지는 대화하다가 맘대로 되지 않을 시 화를 내는 등 불만도 자주 토로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부드럽게 흐름을 빼는 편이었다. 어느덧 서른 남짓이니만큼 변해야한다고도 생각했거니와 옛 연인인 벨토치카 이르마가 화술을 알려줘서기도 했다. 아무로는 화를 못 참지? 그거 안 좋거든, 그래서야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을 수 없어. 그리프스 항쟁 시절 카미유 비단에게 말 몇 마디 잘못해서 빚을 갚기는커녕 이천 냥 빚을 져온 사람이 누구냐 장난치려 했으나 그 진지한 얼굴을 본 순간 진심임을 깨달아 입을 다물었다. 아무로는 불필요한 오해를 사, 사실 그런 사람이 아닌데. 싫어하는 사람한테 잘 보일 필요는 없지만 네게 호감을 가진 사람한테까지 미움을 살 이유는 없잖아? 일리가 있다 생각해서 가르쳐준 대로 말투를 바꾸자 확실히 주변평가는 좋아졌다. 아무로 대위님은 예전에는 무서우셨는데 사실 다정하신 분이셨다 대놓고 얘기한 이도 있었다. 헤어지고서도 이왕 손댄 거 제대로 사람 만들어 보겠다 너스레를 떨며 세심히 AS 해줬으니 고마워하지 않기도 힘들었다. 벌겋게 젖어들은 품 가득 샤아를 끌어안은 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투는 크와트로가 연방 체제를 단념하여 떠난 지 몇 개월이 지나고서야 고쳤으므로 샤아와는 제대로 대화해본 적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콜로니에 떨어져 정신을 차리고서는 이미 사선은 다 넘었거니와 진영싸움도 없는 곳에까지 왔으니 이제 같은 시야를 공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도 품었으나 그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건대 아마 평생 불가능할 성 싶었다. 붙여주기만 해도 다행이 아닐까.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몸이 불안해 잔뜩 피 엉긴 코 아래 손을 대본 귓가로 곧 병원이니까 조금만 참아요, 그 형씨는 많이 위중합니까? 걱정 어린 소리가 파고들었다. 아마 가슴팍을 완전히 적신 피는 제가 흘렸다 생각한 모양이라 이것도 제 피 아닙니다, 가만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을 잃었는지 혹은 급하다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그 후 남자는 묵묵히 운전만 했다. 조급해져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짚으니 최대한 빨리 갈게요, 안심시키려는 태도를 보였다. 괜찮으니까 천천히 가라는 말은 할 수 없어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도 군대 있어봐서 알아요, 소중한 사람이 위험해지면 아주 괴롭지... 1년 전쟁시기부터 10년 이상 다툼이 늘어진지라 오히려 이 시점에는 군대 한 번 다녀와 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터였으므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소년병도 많을진대 언뜻 봐도 마흔이 넘는 사람이 군대 경험이 없을 리도 없기는 했다. 저기 흰 건물 보입니까? 저게 병원이오. 길거리 가득 늘어선 허연 건물들과 무엇이 다르냐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온통 무채색뿐이 존재하지 않는 콜로니일진대 당연히 희어야할 병원이 알록달록할 이유는 어디 있냐는 자조도 들었다. 병원비는 있소? 부상병들을 위한 구제책도 있기는 한데. 우선 치료를 받고 일을 해서 갚는 거요, 사실 빚이지. 딱히 비싸지는 않으니까 한 번 고려는 해보시오. 원무과에서 알려줄 겁니다. 친절은 고마워도 브라이트에게 요청하여 제 명의 예금을 빼오는 편이 더 나아서인지 딱히 써봐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아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말씀 감사드립니다. 꽤 좋은 정책이군요, 감사만 표했다. 요청할 곳이 있다니 다행이오, 형씨. 진심 담긴 말은 악의가 아닐 경우 웬만해서는 사람을 화나게 하지 않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혀는 멀쩡해서 다행이죠. 언제 통증을 호소했냐는 양 입 다물어버린 무릎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다간 잘 치료한다 해도 후유증은 남으리라는 직감이 들어 짧게 한숨 쉬었다. 여기는 관절이나 접지 수술이 발전한 콜로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다 잘될 거요, 남자가 건넨 위로는 귓등을 스쳐 지났다. 잘된다는 게 뭘까 싶기도 했다. 샤아는 그를 죽여 달라 했다, 만약 이대로 수술을 할 경우 사지가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살기는 살 게 분명했다. 그건 잘된 일일까? 제게는 그럴 테지만 샤아는 지옥일 터였다. 품 바듯 안긴 몸 아래서 두근, 두근, 미약한 심장소리가 났다.
어차피 샤아 맘대로 될 수 없다면 나한테라도 좋은 쪽이 낫다.
산 사람은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살아남은 목숨이 죽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아주 옛날서부터 수없이 되풀이 돼온 말을 마음 깊이 담은 채 허리를 폈다. 저도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거한은 그 기막힌 자신감을 무척 좋아했다. 정문 앞에서 내려주겠소, 횡단보도 같은 걸 건너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 걸걸한 목소리를 감싼 감정은 분명 기쁨이었다. 감사합니다, 평소와는 달리 유들유들하게 넘기고는 샤아를 들쳐 업듯 안았다. 어깨 부근을 두근두근 울리는 박동이 너무도 벅차서 입술을 물었다. 지금 자신은 샤아 아즈나블을 안은 것이다, 일생동안 줄곧 제 시간을 지배해온 그 샤아 아즈나블을. 정문 문턱을 넘어 자동문 바로 앞 즈음 차를 세운 남자는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지도 않았건만 조수석 문까지 직접 열어주었다. 조심히 가시오들. 형씨도 치료 꼭 받고요, 심각해 보이니까. 과도한 친절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티 내지 않을 정신머리쯤은 갖춘 지 오래였다. 1년 전쟁 시절에야 미숙했거니와 워낙 사건사고가 많았으므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지만 서른 가까이 된 현재로서는 그럴 일이 없었다. 오래 전 죽은 류나 하야토가 들을 경우 웃을 얘기지만 포커페이스라는 평가도 꽤 여러 번 받았다. 레이 대위님은 늘 초연하셔서 속내를 짐작하기 어렵다는 수군거림도 돌았다고 브라이트가 얘기했었다. 겉으로는 군인이 표정이 많아봐야 약점 잡히기밖에는 더 하겠냐, 그 녀석들도 마음 숨기는 버릇 좀 들이라 해라 손을 내저었어도 이렇게까지 처세술이 발전할 줄은 몰랐다 내심 놀라기는 했다. 브라이트도 아무로 네가 이런 소리를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며 웃음과 찬탄을 금치 않았다.
그래도 샤아한테만큼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속을 완전히 드러냈다.
지나치리만치 드러내 샤아를 질리게 했다. 후회는 하지 않을지언정 방법이 거칠었다는 만큼은 인정할 뿐이 없었다. 혹여 저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고개를 숙인 그대로 서둘러 걸음을 옮겨 접수대를 찾았다. 접수하려 하는데요, 계산은 조금 뒤 할 테니까 우선 이 사람을 응급실로 옮겨주시겠습니까? 달아두셔도 괜찮고요, 부탁하겠습니다. 상태가 심각합니다. 과연 언뜻 봐도 그래 보였는지 급박히 일어선 간호사들이 스트레처 카를 가지러 가는 모습을 보다 남은 직원에게 시선을 돌려 잠깐 전화 한 통 써도 되겠습니까? 가만 물으니 대번 그러라는 답이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직원이 내준 데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하얀 플라스틱 몸체 위를 벌건 손가락이 기었다. 번호를 누른 다음 긴급비밀회선을 호출하자 그제야 모니터가 밝아졌다. 연방 눈을 피해 연락하는 용도로 썼던지라 불과 며칠 전까지 썼던지라 아직 쌩쌩히 살아있었다. 곧이어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이 회선을 아는 사람은 나와 아무로 뿐인데. 혹시 아무로인가? 똑바로 대답하는 대신 템 씨라 불러주는 쪽이 좋아, 연방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거든. 위험부담이 너무 많아졌어, 수화기를 바꿔들었다. 돌아오지 않겠다고? 그럼 혼자 살겠다는 의미인가? 지금 어디인가, 아무로? 다급히 묻는 목소리를 듣다 글쎄, 전화기 선을 꼬았다. 좀처럼 소란이 잦아들지 않는 게 아무래도 잠시 나갔다와야 할 것 같아 우선 내 명의 예금을 다른 계좌로 옮겨주겠어? 돈 없이 살 수는 없으니까, 적당히 아무 계좌로나 옮겨줘. 당장 쓸 수 있는 데로, 몸을 반쯤 기울였다. 한 쪽 무릎이 견디기 힘들 만치 아파와서기도 했다. 떨어지면서 제대로 부딪힌 모양이라 두어 번 둥그렇게 문지르고는 우선 끊을게, 좀 부탁해. 지금 직접 나서기 힘든 상태라서 그래, 전화를 끊었다. 급작스러운 요청이기는 해도 브라이트는 반드시 해주리라는 무모한 믿음이 있었다, 10대 시절부터 함께해온 동료를 향한 신뢰기도 했다. 방금 전 들어온 환자님 보호자님 되시죠? 응급수술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손이며 옷이 온통 피투성이인 모양새로 보건대 아무래도 샤아 얘기가 맞는 듯해서 그렇습니까, 의사 선생님은 어디 계십니까? 비스듬히 섰다. 저 따라오세요, 수납은 이따 하셔도 괜찮으세요. 바삐 걷는 뒷모습을 최대한 빠르게 따랐다. 무릎이 망가졌기에 아주 빠른 걸음은 어려웠으나 가벼운 경보 정도는 가능했다. 인공장기를 이식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수술은 해야 해요. 수술비가 좀 나올 텐데 저희 쪽 후청구 시스템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선생님께 설명 들으신 다음 동의서 작성해주시면 바로 수술 들어갈게요. 수술 받지 않을 경우 상황 악화될 확률이 높아서 하시는 쪽 추천 드릴게요. 네다섯 시간가량 걸릴 텐데 보호자님께서는 대기실 이용하시는 편이 좋으실 거예요. 한 번 뒤돌아보지 않고 설명을 늘어놓는 등 한가운데 저도 치료 받아야할 것 같은데 저는 어쩌죠? 물음을 던졌다. 아, 그제야 고개를 돌린 간호사가 아무로를 시선으로만 한 번 슥 훑었다. 아마 어디가 아픈지 체크하려는 심산이었을 테지만 도마 위 생선이 된 느낌이 들어 썩 기분 좋지는 않았다. 우선 동의서 작성하신 다음 아픈 부분 말씀해주시면 접수나 선생님 부르는 거 도와드릴게요. 살짝 풀 죽은 어조를 듣건대 아무래도 환부가 어디인지 찾지 못한 듯해 조금 웃었다. 신입일까, 1년 전쟁 시절 어떻게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지 몰라서 허둥댄 제가 떠올라 그렇게 해주십시오, 까닥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닦달해봐야 제대로 되는 일이라고는 무엇도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다. 군대나 일반 직장이나 신입들은 다 똑같은 법이었다. 아픈 다리를 끌어 걸어간 방에는 피투성이 의사가 있었다. 대충 올려 묶은 머리와 피곤해 보이는 안색을 마주하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보호자님 되십니까? 후줄근한 매무새를 고치고는 걸어온 의사가 수술을 맡을 사람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빨리 설명 드리고 수술하겠습니다, 이미 준비 시키고 있어요. 여기 앉으세요, 의자를 가리켰다. 과연 메스를 쥔 이여서인지 위압감이 보통이 아닌지라 네, 저도 모르게 평소보담 얌전한 태도를 취했다. 몇 군데가 파열됐는데 다행히 아주 심하지는 않습니다, 들으셨겠지만 인공장기를 이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몇몇 군데를 떼어낸 다음 남은 부분을 이어야할 것 같아요. 아주 못 쓰게 된 곳도 있거든요, 심각한 건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다행히 치명상은 입지 않았어요. 다만 다리는 좀 절을 수도 있겠습니다, 후유증이 남을 거예요. 팔 한 쪽도 예전처럼 움직이시기는 힘들 거고요. 재활치료를 하면 한 80% 정도는 회복 가능합니다. 이런 부작용이 있을 수는 있는데 확률은 20%를 넘지 않으니만큼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별 일 아니라는 양 의사가 내민 서류에는 전신마비, 혼수상태 등 무시무시한 경고문구들이 적혀있었다. 아연해져 입을 다문 아무로 쪽으로 흘러온 시선은 까뭇했다. 그렇다고 수술을 하지 않으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은 위독한 상태까지는 아니지만 곧 위험해질 겁니다. 겁을 주는 게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사실입니다. 군인으로서 그를 모를 리가 없어 더 답답했다. 어딘가를 다쳐 실려 올 경우 일각을 다퉈 수술해야 살 확률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렇지만 역시 샤아가 이런 건 무서워... 너무도 우스운 일이었다, 사선도 몇 번이나 넘나 들었건만 겨우 다른 사람 몸 가르는 일 동의서를 작성하는 게 무서워 머뭇거린다니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볼 경우 실소를 금치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방도도 없었으므로 사인은 했으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보호자님께서는 여기 계셔도 되고 다른 데 계셔도 됩니다. 이만 저는 수술하러 가보겠습니다, 네다섯 시간 정도 걸릴 거고 좀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수술 후에는 1인실이나 2인실 들어가실 거고요. 병실 먼저 가 계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엄격히 말하고는 뚜벅뚜벅 걸어가는 뒷모습을 응시하던 시선을 떼 제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시퍼렇게 부은 모양새가 영 우스워 보여 저기요, 뒤에서 바지런히 약품을 정리하는 간호사를 불렀다. 방금 전 저를 여기까지 안내해준 간호사와는 다른 사람이어서 상황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생각했다. 네? 무슨 일이신가요? 상냥히 다가온 간호사에게 저도 무릎이 아픈데 진료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방금 전 선생님을 안내해주신다 했는데, 다리를 내보인 순간 많이 부으셨네요, 아직 접수 못하셨나요? 날카로운 진단이 따랐다. 접수해드릴 테니 응급실로 가세요, 오늘 예약이 다 차서 응급실 가셔야할 것 같아요. 수술까지는 하지 않으셔도 괜찮으실 것 같지만 그래도 선생님 뵈셔야죠.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달리 반박할 이유도 없어 이름을 말한 다음 부탁드리겠다 고개를 숙였다. 당장 걷기도 힘들건만 접수해주겠다니 고마운 일이라 생각했다. 잠시 응급실에서 기다려주세요, 서둘러 방을 나가는 간호사한테서 시선을 돌려 제 무릎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시뻘겋게 부풀었다,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천천히 다리를 끌어 응급실로 내려가니 방금 전보담 환자가 늘은 게 확연히 보였다. 기계 관련 산업 종사자가 많은 콜로니라서인지 손가락이 잘린 사람이며 다리가 으깨진 사람, 옆구리가 뚫린 사람 등등 유독 심하게 다친 이들이 자주 보였다. 나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군, 붙어있기는 하니까 말이야. 멍하게 앉은 시야 가로 저 멀리서 달려오는 하얀 가운이 들어왔다. 저 사람일까, 과연 짐작은 틀리지 않아 곧 템 레이 환자님이냐는 물음을 들었다.
벌써 14년 전 죽은 아버지는 이름만으로 되살아났다.
뱃속을 간질이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내고는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무릎 관련해서 접수 주셨죠, 한 번 보겠습니다. 역시 직업을 가진 지 얼마 안돼 보이는 젊은 의사는 무척 조심스레 무릎을 매만졌다. 통증은 느껴지시나요? 따끔거리시나요, 욱신거리시나요? 혹은 불타는 것 같나요? 미간을 찡그린 채 이것저것 묻는 날렵한 콧등을 내려다보다간 글쎄요, 지금은 또 아프지 않아서. 처음에는 욱신거렸습니다, 뜨겁기도 했고요. 움직일 때 자꾸 다리가 풀렸어요, 최대한 자세히 증상을 풀었다.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무릎 관절 쪽이 부서진 게 아닌가 싶은데요. 자세한 건 X레이를 찍어봐야겠습니다. 걷기 많이 힘드십니까? 사실 많이 힘드실 것 같은데요. 괜찮으시다면 휠체어로 옮겨드리겠습니다. 더 무리해봐야 하등 좋을 게 없었으므로 이왕 신세지는 거 아주 몸을 맡기는 쪽이 낫겠다 결단 내렸다. 확실히 걷기가 좀 힘들군요. 자존심이 세다지만 미래를 고려하지 않는 성미도 아니었다. 샤아가 재활치료를 할 동안 누군가는 바로 옆에서 도와줘야 할 텐데 저까지 무릎이 박살나서야 곤란했다. 이 환자님 방사선실까지 데려다주세요, 다 찍은 다음에는 제 방으로 오세요. 아마 같은 팀인 듯한 간호사에게 이것저것 얘기하고는 수술은 하지 않아도 괜찮으실 것 같습니다, 꼭 대단한 얘기라도 하듯 조용히 일러주고 서둘러 다른 환자에게 가버렸다. 아무래도 보통 바쁜 게 아닌 것 같아 많이 바쁘신가 봐요, 하니 워낙 환자님들이 늘 많이 오셔서요, 웃는 얼굴을 한 채 휠체어를 가져왔다. 언제나 일손이 부족해요. 고개를 돌려 다시 그 부지런한 뒷모습을 본 순간 문득 첫 연인 세이라 마스가 떠올랐다. 의사가 되겠다던 그녀는 오빠인 샤아 아즈나블을 막기 위해 결국 군인이 됐다. 지금은 의료 분야를 지원할 뿐 직접 의사가 되겠다는 꿈은 접었다 들었다. 환자인 척하는 암살자를 맞을 수도 있기에 알테이시아 솜 다이쿤이라는 이름을 단 채 다른 사람을 치료하기는 힘들기도 했을 터다. 똑똑하거니와 사명감도 있었으므로 아마 원한 길을 걸었더라면 누구보담 뛰어난 의사가 됐을 게 분명했다. 간호사와 함께 층계를 내려가 X레이를 찍고서 의사를 만났다. 다행입니다, 관절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어요. 뼛조각이 떨어지기는 했는데 크게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인대는 자연치유가 되는 부분이니까요, 다른 불편한 부분은 없으십니까? 큰 부상이 아니어서인지 환부를 설명하면서도 싱글벙글한 낯이었다. 글쎄요, 다른 부분은 딱히... 그렇게 심하게 떨어지고서도 무릎 한 짝만 다쳤다니 기실 기적도 이런 기적이 없었다. 브라이트가 알 경우 MS한테 사랑받는 놈이 분명하다는 말을 할 게 확실했다. 무통주사 놔드릴 거고요, 통원치료 하셔도 괜찮습니다만 당분간은 전체적인 상태도 볼 겸 입원하시는 게 어떨지요? 강요는 아닙니다. 하지만 전신 타박상 문제도 있으니까... 물리치료도 하루 세 번 받으셔야하고요. 한동안은 목발 짚으셔야 합니다, 무릎을 쉬어주실 필요가 있어요. 무릎 고정도 해드릴 겁니다. 너무도 열정적이어서 저도 모르게 그 모든 말을 수용했다. 아, 그런데 제가 보호자기도 해서요. 너무 떨어진 병실은 곤란한데요... 지금 수술 들어간 환자거든요, 그러니까 에드와우 마스라고. 저는 한 번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을 적은 이유는 순전히 잘 알려지지 않아서였다. 크와트로 버지나와 샤아 아즈나블, 캐스발 렘 다이쿤이라는 이름은 전 우주가 알았다. 에드와우 마스만이 그 화려한 역사 아래 숨어있었다. 만일 세이라가 교제할 때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무로조차도 평생 몰랐을 터였다. 아, 제가 원무과와 통화하겠습니다. 같은 병실을 배정해 달라 할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쇠뿔도 단김이라고 서둘러 수화기를 들은 손이 여보세요?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아, 다름이 아니라 입원실 배정 때문인데요. 기어이 원한 바를 이루고서야 전화를 끊은 의사는 무척 만족한 낯으로 웃어보였다. 네, 2인실 배정해드렸습니다. 602호실이에요. 무통주사 준비됐나요? 이리 주세요. 알코올 솜을 꺼내 관을 찔러 넣을 부분을 문지르는 모습을 보다 세이라 씨도 이런 의사가 되기를 꿈꿨을까, 잠시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세심히 돌봐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을까. 소중한 사람을 잃어 복수자가 된 샤아와 다른 이들을 구하겠다 나선 세이라는 얼마나 다른가. 수없이 많은 목숨을 빼앗아 짓밟은 샤아가 실상 더 따스한 심성을 지녔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운 점이었다. 엑시즈 낙하계획은 결국 좌초됐어도 그 뜻만은 비난하기 어려웠다, 스페이스노이드를 향한 차별이 사라져야 한다는 데는 아무로도 동의했다. 연방이 마냥 선한 조직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 녹을 받아먹으며 일한 아무로 레이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약물을 넣기가 무섭게 무릎이 차가이 식는 게 느껴져 허벅지를 두어 번 꾹꾹 눌렀다. 됐습니다, 곧 고정해드릴게요. 검은 뿔테 안경이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감사합니다, 이런저런 기구들을 가져와 처치하는 모습을 물끄럼 응시하다 고개를 돌려 상앗빛 벽을 바라보았다. 실제 상아를 사용했을 리는 없으니만큼 도료인 듯싶었다. 피곤해도 잘 수 없다, 깨있어야 한다. 한동안은 제대로 잠들지 못하리라, 아무로는 초록색 붕대로 단단히 고정된 제 무릎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다 끝났습니다, 이제 가셔도 됩니다. 의사는 반짝반짝 웃었다. 다시 한 번 고맙다 인사한 다음 방을 나와서 접수대 쪽 간호사를 찾았다. 전화 한 통 쓸 수 있겠습니까?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으로요, 미심쩍다는 표정을 하고서도 빈 사무실을 안내해준 간호사에게 고개 숙여 감사 표시를 해보였다. 아마 브라이트는 부탁한 일이 됐든 안됐든 애타게 저를 기다리는 중일 터라 빨리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방금 전처럼 누르자 아무, 아니 템! 분노 섞인 부름이 날아왔다. 응, 여러모로 바빴어. 치료도 받아야했고. 화가 난 브라이트를 다루는 방법은 그 아내인 미라이만큼은 아니어도 얼추 알았으므로 부러 어조를 낮춰 태연을 가장했다. 지금 어디인가? 왜 돌아오지 않겠다는 거지? 혹시 연방이 널 해코지라도 할까봐? 그러지는 않을 거야, 제아무리 썩은 집단이라도 대영웅을 건드릴 만치 미치지는 않았어. 오히려 겁쟁이들이라고, 흥분해 연설하는 브라이트를 내 얘기 좀 들어봐, 가볍게 진정시키고는 수화기를 바꿔 쥐었다. 피를 닦지 않아서인지 하얀 몸통 여기저기 붉은 자국이 묻었다. 지금 여기가 어딘지는 잘 몰라, 정신 들고 바로 병원을 찾았거든. 듣기로는 기계 주력인 콜로니라는군. 지구에서 아주 먼 곳은 아니겠지.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듣는 중인 것 같아 조용히 말을 이었다. 사실 돌아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그게 아냐, 그건 아무렇지도 않아. 연방 고위놈들이 나를 건드리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아. 샤아 같은 놈이 또 나타날지 모르잖아? 잘 싸우는 놈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는 법이거든, 카미유 비단도 쥬도 아시타도 군을 이탈한 지금 가진 이만한 무기가 또 어디 있어. 그렇지 않아? 긴 침음을 흘리면서도 물론 그건 그렇지, 긍정한 브라이트에게 들으면 놀라겠지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에드와우 마스가 살았어.
순간 숨소리가 멈췄다 돌아왔다. 전화기를 떨어뜨렸건 잠시 호흡을 멈췄건 한 것 같아 그래서 못 돌아가, 눈을 감았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서도 위엄 넘치는 음성만큼은 또릿하게 들렸다. 에드와우 마스라니, 혹시 세이라 씨의... 오빠 말인가. 1년 전쟁 시절서부터 수없이 많은 전쟁터를 거친 만큼 과연 눈치도 빨라 금세 호칭을 정정했다. 응, 맞아. 걔야. 살았어, 지금 수술 들어갔거든. 살 것 같아. 내가 살라고 했어. 기가 차다는 양 혀 차는 소리가 들렸으나 굳이 짚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래서 돈이 필요해. 예금은 충분히 해뒀어, 아마 꽤 많을 걸. 집도 처분해주겠어? 직접 가기는 힘드니까. 묵묵히 듣던 브라이트는 아무로가 입을 다문 순간에야 네 예금은 다른 계좌로 옮겼어, 본론을 꺼냈다. 세이라 씨한테 감사해, 도와주셨으니까. 네가 살았고 네 명의가 아닌 계좌를 필요로 한다 전하니까 바로 다른 명의를 준비해주셨어. 당연히 이유는 묻지도 않으셨고. 나중에라도 감사인사 해. 예금은 다 보내놨어, 계좌번호와 비밀번호 받아 적어. 고맙다 인사하고는 메모지를 끌어다가 숫자 몇 개를 적었다. 돈을 빼는 데 카드 같은 건 필요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고마워, 살았다. 깜박 빚쟁이가 될 뻔했어. 너스레에도 브라이트는 웃지 않았다.
정말 그 녀석과 같이 살 셈이냐.
대답하는 대신 어떨 것 같아? 말을 돌렸다. 에드와우 녀석은 똑똑하니까 같이 살기 무리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불편한지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지금 장난치자는 소린가? 아예 말을 끊은 상대에게 아마 그 녀석은 안 괜찮겠지, 느릿히 사실을 고했다. 하지만 어쩌겠어, 지금 보호자는 나인데. 어차피 살았다는 자체를 괴로워할 녀석이야. 숨을 쉰다는 자체보다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괴로워하며 살기를 바라. 그게 나아. 수화기가 깊이 한숨 쉬었다. 악역을 자처하겠다는 말이냐? 자처할 필요도 없이 샤아를 비롯한 스페이스노이드한테는 제가 절대 악일 터였으므로 그런 셈이지, 대충 얼버무렸다. 정말 템 너를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모르겠다. 정말 에드와우 그 녀석이 뭐길래? 잠시 말을 멈췄다. 글쎄, 뭘까. 갉작갉작 발을 갉아먹는 검은 침묵을 쳐다보다 인생, 목표 같은 단어들을 뱃속 깊이 쑤셔 넣었다. 결이 날카로워 속을 베였다. 내색하지 않았다. 어쨌든 고마워, 다시 전화할게. 지금 나도 좀 다쳐서 입원했거든, 전화도 빌린 거야. 곧 집을 구할 것 같으니 그때 길게 통화하자고. 무어라 더 얘기하려는 상대를 뿌리치고 수화기를 턱 소리 나게 내려놓자 모니터도 꺼졌다. 수건이나 물휴지가 없어 붉게 물든 몸통을 닦지 못한 채 털레털레 나왔다. 감사합니다, 전화 잘 썼습니다. 입원환자인데 병실 올라가도 괜찮겠습니까? 어느새 의심하는 기색을 싹 지운 간호사가 따라 일어나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환자님? 부드럽게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없이 자란 어린 시절에도 이런 대접은 받아본 적이 없었으므로 조금 얼떨떨했다. 목발은 처음 써보는지라 거동이 불편해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6층까지 올라간 다음 602호실을 찾았다. 2인실이라서인지 두 침대 모두 비어있어 어디 누워야 샤아가 좀 더 편하게 들어올 수 있나 고심했다. 보통 오른손잡이들이 많으니까 왼쪽이 낫겠군, 화장실로 가 얼굴과 몸을 대충 씻어낸 아무로는 놓여있는 환자복으로 갈아입고서야 바로 누웠다. 천장이 유독 새하얘 눈을 비볐다. 수술은 잘 되는 중일까, 자꾸만 깜박깜박 잠이 와 결국 눈을 감았다. 샤아를 돌보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자둬야한다 어설픈 자기합리화를 했다.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절대안정입니다, 첫째도 절대안정이고 둘째도 절대안정이에요. 결코 흥분하셔서는 안 됩니다, 흥분 시키셔도 안돼요. 몇 시간 전보다 더 피곤한 낯을 한 의사가 하는 당부를 손 모은 채 경청했다. 잘 끝났어요, 운동 꼭 시켜주시고요. 재활을 빨리 시작할수록 퇴원일도 당겨집니다. 오늘은 좀 힘들 거고 내일부터는 하실 수 있겠네요. 너무 누워계실 경우 가스가 차서 환자님이 더 힘들어지세요. 당장은 힘들지 몰라도 내일부터는 꼭 하셔야합니다, 아셨죠? 매일 아침 10시 쯤 검진 올게요. 굳이 깨어계실 필요는 없지만 보호자님께서라도 상태를 말씀해주시는 게 좋겠죠. 보호자님께서도 환자시니까 무리한 부탁은 드리지 못하겠지만... 불과 다섯 시간 전 멀쩡히 입원동의서를 작성한 사람이 갑자기 환자가 돼 같이 누웠으니 의사로서도 당황할 뿐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 당혹감이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닌지라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전신마취 깨실 테니까 얘기 몇 마디 나눠주세요. 그래야 정신 더 빨리 들거든요. 알겠다 대답하고는 목발을 짚어 그 옆으로 갔다. 최근 임무가 고됐는지 에우고 시절보다 마른 몸 여기저기 묶인 붕대가 안타까웠다. 어떻게든 대화를 했어야 했는데, 그리프스 항쟁 시기 제게 호의를 보였던 크와트로를 매정히 대한 게 이리도 후회될 수가 없었다. 샤아, 거칠게 일은 볼을 가만 쓸었다. 내 이기심이라도 네가 살길 원해, 샤아. 등 부분이 까진 손바닥을 잡아 올려 얼굴을 묻었다. 주인을 닮아 잘 뻗은 가락이 움찔 떨렸다. 급히 시선을 들어 똑바로 누운 얼굴을 바라본 순간 별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아래 맺힌 시선은 여전히 파르란 색이었다. 아무, 로. 분노도 증오도 기쁨도 담기지 않은 공허한 어조였다. 네가, 결국, 나를. 갈라지다 못해 띄엄띄엄 끊기는 소리를 듣다 그래,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샤아. 도망칠 방도도 없건만 꽉 붙잡은 손가락 새로 조심스레 제 가락들을 얽었다.
내가 널 살렸어.
마침내 꺼풀을 반쯤 내리감은 샤아가 죽일, 생각은 없어? 역시 희미한 말을 흘렸다. 배가 아픈지 쉬이 몸을 일으키지는 못하는 모양새를 보다간 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생각 없어. 산 목숨은 어떻게든 살아야하지 않겠어? 널 살리기 위해 죽은 스페이스노이드들을 생각해. 네가 이렇게 만든 날 생각해. 순간 파르란 눈이 불탔다 사그라졌다. 그런가, 그래서 나는 살아야하나. 죄를 갚기 위해서라도? 그 미약함을 막 접했을 적에는 사람을 살리는 데 죄책감을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미처 몰랐으므로 드디어 죽을 생각을 단념시켰다는 성취감뿐이 느끼지 못했다. 만약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런 방법은 처음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터다, 있는 힘껏 부딪혀 방안을 찾았을 것이다.
샤아는 그날부터 스스로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당연히 눈치 채지 못했다, 한 번 묻혔다 끌어올려진 에드와우 마스라는 이름도 당장 마주한 상황도 잘 받아들이는 듯 보였기에 상황판단이 빠른 사람이니만큼 현실을 받아들인 게 분명하다고만 여겼다. 저 의지 강한 인간이 설마 체념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승리감을 즐기느라고 사람 맘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리스크는 크게 돌아왔다.
퇴원하고서도 샤아는 병원에서와 비슷하게 책을 읽거나 TV를 보며 지냈다. 그 라라아 슨과도 대화는 얼마 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언뜻 들어 부러 말을 많이 시키지는 않았다. 그게 실책이었을까, 혹은 시작이 문제였을까. 샤아는 점차 침잠했다. 원래 적었던 말수는 점점 적어져 나중에는 하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때까지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몰랐다, 죽고파하는 놈 살려놔서 괜히 강짜 놓는 거려니 했다.
1년하고도 다섯 달 전 그날까지만 해도 그랬다.
분명 아무 문제없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흘러가리라 생각했다. 달리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아도 같이 식사를 하고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지낼 터라 한 치 의심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거의 신봉했다. 유리 성 같은 일상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허나 예상 따위 용납지 않는 사내인 샤아 아즈나블은 함께 보낸 모든 시간과 기대를 기어이 박살냈다.
그 날 아침 샤아는 유독 늦게 일어나 정말 진기한 생명체라도 보듯 아무로를 바라봤는데 그 시선이 너무나도 선득해 왜 그래, 샤아? 저도 모르게 먼저 말을 걸었었다. 아무로, 네가 왜 여기 있지? 찰나 등골이 오소소 일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여기 있냐니, 우리 집이니까 있지. 잠 덜 깼어? 조심스레 다가가 침대 가장자리 즈음 걸터앉으니 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쪽만 빼죽 올라간 눈썹이 답지 않게 귀여우면서도 두려워 샤아? 다시 그 이름을 부른 순간 아무로 네가 여기 있을 수가 없는데? 얼토당토않은 소리가 날아왔다. 무슨 소리야, 샤아. 내가 왜 여기 있을 수가 없어? 여기 우리 집이잖아, 잠 좀 깨봐. 오늘따라 이상한 농담을 하네, 평소에는 말도 잘 안 하더니만. 어디 아파? 약 줄까? 먹을 때 되기는 했다, 억지로 웃는 입매를 만들어 보인 아무로 쪽으로 흘러온 파르란 시선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나 아예 무릎을 꿇은 채 그 말간 낯을 올려다보았다. 샤아는 입 꾹 다문 그대로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곧 비틀비틀 일어나서 소파로 향했다. 아, 이 소파는 그대로네. 식탁도 있어. 여긴 네 집이야, 아무로. 밤사이 완전히 돌아버렸나, 혹시 약을 잘못 받아왔나 싶어 서둘러 부엌으로 달려가 더듬더듬 약봉투를 꺼낸 뒤통수를 아무로, 후려친 목소리는 언제나와 단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지나치게 여상해 소름이 돋았다. 네가 여기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있는 게 문제인 거야.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간신히 갈무리해 겨우 고개를 돌렸다. 약은 정확했다, 늘 먹는 종류였다.
아무로, 나는 꿈을 꾸는 중이다.
샤아가 그 새벽 무슨 꿈을 꾸었는지 지금도 자세히는 모른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허나 그 날 샤아는 명확히 말했다, 이건 꿈이라고. 자신은 깨야만 한다고. 멍청히 선 제가 이상한지 꿈이라 말해도 깨지 않는 건가? 그럼 어떻게 깨야하지? 다른 방법은 모르겠는데, 죽기라도 해야 하나? 하염없이 거실만 서성이는 몸을 억지로 눌러 앉혔다. 샤아, 자해한대서 깨지 않아. 이건 현실이야, 무의미한 짓 하지 마. 샤아는 웃었다. 활짝 핀 얼굴을 보기는 실로 7년만이었으나 감격할 겨를은 없었다. 반 불구가 된 것으로 모자라 미쳐버리기까지 한 샤아를 어떻게든 정신 차리게 해야 했다. 아무로, 이건 현실이 아니야. 꿈이지, 왜냐하면 넌 날 원망하잖아. 투명한 시선이 가늘어졌다, 익사할 듯한 기분을 느꼈다.
네가 날 연방한테 넘겼어.
대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연해진 나머지 잡은 팔을 놓쳐버렸건만 샤아는 빠져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게 꿈이라면 어디로 도망쳐도 네게서 벗어나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아무로, 너무 이상해. 너는 왜 나타난 걸까? 내가 널 그리워하는 걸까? 아무로 네가 날 그리워할 리는 없는데. 비틀거리다 TV를 지지대삼아 간신히 버티고 섰다.
샤아는 미친 게 아니다.
누군가 볼 경우 저게 미친 게 아니면 뭔가 일갈할 터였으나 20년 가까이 되는 기간동안 샤아와 칼을 맞대 살아온 아무로로서는 착각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샤아 아즈나블은 미치지 않았다, 단지 도치시킨 것이다.
현실과 꿈을 바꿔치웠다.
버터기 힘든 삶을 하루하루 살아내다 마땅한 꿈을 마주한 순간 먹어치워 버렸다. 아무로는 저를 바라보는 파르라니 투명한 눈을 마주 응시하다 주저앉았다. 어떡하지, 라라아. 그 이름을 찾기는 꼭 14년 만이었다.
쉬이 돌아오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지속될 줄도 몰랐다. 벌써 1년이 지났건만 샤아는 계속 비슷한 상태다, 오히려 더 나빠졌다. 처음에는 이 꿈은 연속되느냐 놀라기라도 하더니만 지금은 또 아무로 너인가? 같은 미치고 팔짝 뛸 말만 주워섬긴다. 이 꿈은 너무 현실 같다는 얘기를 몽롱히 할 적마다 이게 바로 현실이다, 네가 현실이라 생각하는 쪽이 꿈이니까 그만 정신 좀 차려라 일러주기도 이제는 지쳤다. 아무로 레이는 한 치 미동도 없이 고요히 앉은 별빛 뒤통수를 바라본다.
이제는 어떡해야 할까?
라라아, 라는 이름은 가슴 깊이 집어넣었다. 그녀도 돕지 못할 영역이다, 꿈과 하나가 되어버린 샤아는 라라아 슨조차도 붙여주지 않으리라 짐작했다. 마른 손바닥 두 개를 붙여 얼굴을 묻었다. 낮이 길었다.
FLOWER GUN
-오리진 이후 약한 대인기피증에 걸린 아무로와 숨어 사는 샤아 얘기 / 전연령가
-15년도 8월에 낸 책 재판입니다.
“연방의 영웅이 되셨어요. 평범한 열다섯 어린 소년에서 영웅이 된 기분이 어떠세요? 붕 뜬 것 같지 않나요? 물론 싸우느라 힘들었다는 건 알지만 이제 대우 받을 일만 남았잖아요, 당신이 죽을 때까지 국가에서 연금도 줄 거고. 당신 활약상은 그만큼 대단했어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죠?”
“그런가요.”
“그런가요, 라니요! 당신의 활약상을 모르는 거예요? 그나저나 표정이 좋지 않으시네요, 역시 아직도 전쟁 후유증이 있으신 건가요? 6년이나 지났는데?”
“무례한 질문입니다.”
“국민들은 당신의 진솔한 답을 원해요!”
“국민? 당신이 원하는 게 아닌가요. 대체 전쟁 중에 어디 있었습니까? 내 마음 하나 이해 못하는 당신이 유명 신문 기자라고요? 그렇게 공감능력이 떨어져서야 어디 계속 기사 쓰겠습니까? 비키세요, 당신과 더 이상 할 얘기 없어요.”
“제가 당신 기사를 나쁘게 써도 좋다는 뜻인가요, 그건?”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전 이제 군인도, 공인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이야 절 돌아보며 수군대는 사람들도 점차 저를 잊겠지요, 저는 그들이 그리도 잊으려 애를 쓰는 전쟁 속의 사람이니까. 그때가 되면 저는 완전한 일반인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 평범히 마트에서 장을 보고 기계를 만지는.”
“그런!”
“이만 가보지요, 안녕히 계십시오.”
“저기요, 아무로 씨! 아무로 레이 씨! 저기요!”
1
Mind burn
입맛이 썼다. 아무로는 저를 인터뷰했던 기자가 쓴 기사를 읽다 신문을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거만한 사람이었다느니 제 멋에 취해 까분다느니 기자 자신이 한 폭언은 쏙 빼고 쓴 꼴이 우습지도 않아 푸우, 한숨만 쉬었다. 이 기사만으로 아무로 레이가 이런 놈이었어? 전쟁 좀 잘했다 칭찬해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다 보네, 저를 재단해댈 사람들과 어릴 때 전쟁을 경험했으니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 이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샤아 아즈나블에게 잡아 먹혀 지온의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제 일인 양 항변해줄 사람들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정말 웃기지, 남의 일로 언쟁 벌이는 사람들이 이리 많다니. 아무로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일 년 전쟁이 시작됐던 해로부터 벌써 6년이 지났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저와 3년을 보낸 세이라는 나이 스물의 어느 날 아무로 군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아, 네 마음속에는 나도, 너도 없어. 대체 누가 있는 걸까? 그 라라아 양일까? 아무 인연 없었던 사람이라는 듯 훌쩍 떠나가 버렸다. 무슨 소리예요 세이라 씨, 저는 당신이 필요해요. 혼자 남겨두지 말아요! 붙잡는 제 손을 매정히 끊어내곤 언제나처럼 오만히 웃은 세이라가 거짓말쟁이야 아무로 군은, 늘 혼자 부유했던 주제에 떠난다니 이제야 이러는 거야? 더 이상은 네 걱정인형 짓 하기 싫어. 그러니 아무로 군, 이별이야. 전화번호는 식탁 위에 올려놨어. 맘 정리 됐을 쯤 친구로서 연락하렴, 끝끝내 미련 남을 경우 그때는 서로에게 없는 사람 하자.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안녕, 인사 한 마디 남긴 채 문밖으로 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 전쟁 트라우마와 부모 문제, 고통을 모두 들어줬던, 같이 전쟁 통을 겪은 사람이 떠난다, 그건 큰 충격이었다. 그보다 더 충격이었던 건 그녀가 한 말이었다. 네 안에는 나도, 너도 없어. 누가 있는 거니? 라라아 양? 세이라는 언제나 라라아를 신경 썼다. 저는 붙잡을 수 없었던 오빠 샤아 아즈나블을 정착시킬 뻔했던 데다 아무로의 맘에까지 깊은 자상을 입힌 여자. 자존심 강한 세이라가 그녀를 용납하지 못한 건 꽤 당연했으나 아무로는 제 맘속에 든 게 라라아가 아니라 단언할 수 있었다. 실제로 라라아가 꿈에 나온 건 1년 전쟁 이후 고작 반 년 간이었다. 오히려 드문드문이라도 계속 나온 사람은 샤아였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샤아 아즈나블, 1년 전쟁 시절 연방의 적 지온 공국의 에이스이자 제 라이벌, 동시에 라라아의 연인이었던 남자. 그 당시 붉은 혜성이다, 공포의 샤아 아즈나블이다 이러저러한 호칭으로 악명 떨쳤대도 어째 그 전쟁 마지막 밤 이후 도통 나타나질 않아 과거의 망령이 된 사람이 왜 제 꿈에 나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뭐야? 왜 샤아가 나와? 이상한 일이야. 물론 잊지는 못했다. 별 가득 박힌 까만 밤하늘 아래서 흩날리는 별빛 머리카락 흰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다 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 반짝이는 파르란 눈동자 사르르 접어 웃던 그를 어찌 잊는단 말인가. 남몰래 가슴에 품었던 꿈은 어느 순간 보석이 돼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게 됐다.
그걸 눈치 챈 걸까.
세이라가 나간 집 안에서 아무로는 차라리 오빠인 샤아를 품은 게 아니냐 해주지, 그럼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의미 없는 생각을 했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 문은 또 어찌나 예쁘게 닫았던지 눈 시리단 핑계로 울 수조차 없어 더 눈물이 났다.
그녀에게 전화 건 순간 돌아와 주세요, 목 놓아 외칠까 두려워 숫자 한 자리 못 누른 탓에 3년이 지난 지금은 안부 묻기도 영 이상한 모양새가 돼버렸다, 이제는 별 미련 없는 데도. 그녀가 먼저 연락할 일은 없을 테니 이대로 연락이 끊기는 건가, 라는 생각도 수백 번 했다. 푸우, 잇새로 한숨이 샜다.
우리를 이리 만든 샤아는 살아 있을까.
1년 전쟁에 관한 잡지를 팔락거리던 아무로는 문득, 나와 세이라 씨 관계를 요지경 요 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그러뜨린 샤아 아즈나블은 대체 어디 있을까, 설마 죽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죽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어디 있을까. 사람 손가락에 눌려 팔랑팔랑 우는 종이를 도울 수 없어 웅웅, 몸을 흔들던 공기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깃에 맞아 비명 질렀다. 공간 가득 서러움이 찬다. 아, 이러다가는, 죽는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괴로움에 찬 신음 한 마디 뱉은 아무로의 바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울었다. 너는 또 왜 울어, 왜 울어. 빼낸 기계가 흘린 카이 시덴이라는 이름이 뚝, 뚝, 발치에 맺힌다.
“여보세요.”
-여어, 아무로. 또 목소리가 안 좋네?
“무슨 일이야.”
-지금 집인가? 아니군, 시끄러운 걸 보니 밖이지?
“밖이지.”
-아니 좀 볼 수 있을까 해서 말이야... 긴히 할 말이 있거든. 전화나 문자로는 안 될 말인데 난 오늘밖에 시간이 안 돼. 내일이면 또 우주로 나가야 해서. 지구에 있을 때 우리 영웅 씨 얼굴도 볼 겸 얘기도 할 겸.
“그 영웅이라는 호칭은 때려 쳐. 몇 시쯤 올 건데. 참고로 우리 집에 저녁거리 같은 건 없어, 늘 인스턴트 사다 먹으니까.”
-이야, 이제 너도 몸 챙겨야 할 나이라고, 맨날 그렇게 인스턴트만 먹으니까 키가 안 크지. 너 키 몇이지? 175는 돼?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카이. 우리 둘 다 성장기 때 전쟁을 겪는 바람에 키가 안 큰 걸 거야. 뭐, 사실 나는 부모님께서도 둘 다 크신 편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몇 시에 올 거야. 저녁에 먹을 만한 건 네가 알아서 사 와.”
-손님한테 먹을 거 사오라는 거야?
“네가 온댔지 내가 오랬냐.”
-거 매정하긴. 요즘 언론계에서 너 매정하다는 소문이 아주 자자해, 가는 곳마다 들려.
“맘대로 떠들라 그래. 6년이나 지난 마당에 이제 나 좀 내버려 둘 때 됐잖아. 이제 인터뷰 하려는 놈들도 좀 줄려나.”
-그럴지도? 잘 됐어, 이제 연방 영웅님 인터뷰는 내가 독점하는 거야.
“헛소리하지 마. 너 진짜 몇 시에 올 거냐고, 말 돌리지 말고 그 얘기부터 해.”
-말 돌린 거 아니야, 자꾸 네가 물 만한 말을 하잖아. 흠, 아마 1시간에서 2시간 뒤 쯤.
“1시간 뒤에 봐. 집에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오, 잘 됐군. 2시간은 살짝 떠서 어디 가있을까 했는데. 알았어, 그럼 1시간 뒤에 보자고, 아무로. 저녁거리는 그냥 아무거나 사 간다. 피자 괜찮지?
“괜찮아.”
-피자도 인스턴트긴 하다만 레토르트보다는 낫겠지. 괜찮은 데서 사 갈게, 여러모로 할 말이 좀 있다, 아무로.
“이보다 더 할 말이 있다고?”
-내 별명이 속사포잖냐, 속사포. 그때 보자.
“알았어. 조심히 와라.”
-유해졌네. 예전에는 응, 한마디로 끊더니.
“유해질 필요가 있지, 나이 스물에 어린애처럼 틱틱 대기도 이상하잖아.”
-뭐, 그렇긴 해. 알았다, 이따 봐.
끊긴 전화가 조용히 몸을 떨었다. 흘끔흘끔, 지나가는 사람들이 제게 시선 한두 번 씩 꽂는 것 같아 서둘러 택시에 몸을 싣고도 혹시나 운전기사가 저를 알아볼까 모자까지 더 눌러 썼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손님? 따분한 목소리가 그리 다행일 수 없었다. 집 주변 거리를 말한 아무로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긴장 덩어리가 된 느낌이었다.
달칵, 달칵.
열쇠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이 제 주인을 집어 삼켰다. 헉, 헉, 집 밖에 내딛는 걸음걸음이 숨통 콱 틀어막기 시작한 지도 벌써 3년째다. 지겹지, 지겹지. 선글라스를 집어 던졌다. 세이라의 빈자리는 히스테리와 대인기피증이 채웠다. 각종 신경증으로 가득 찬 집이 어서 와, 여기 있어 아무로, 역시 밖보다는 집이 좋지? 반가이 인사하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지겹지, 진짜.
털퍽, 소리 나게 앉아 마릇한 얼굴 몇 번 쓴 아무로는 곧 카이가 온댔지, 그 전에 집 치워놔야 할까, 치울 것도 없는 집 안을 돌아보았다. 혼자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방 세 개, 침대 하나, 화장실 하나. 오히려 남자 혼자 살기에는 넓어 이 곳에 그나마 놀러오는 하야토나 카이 같은 친구들은 너 결혼 안 하냐? 요즘 세상에 너 같은 신랑감 드물어, 집 있어, 돈도 꼬박꼬박 나와, 기술도 있어, 그 와중에 얼굴도 괜찮지. 얼른 여자 만나라, 넌지시 새로운 교제를 권하다 못해 혹시 세이라 씨를 잊지 못한 거야? 아예 직구를 던지기도 했다. 분명 3년 전까지는 그랬다. 그녀의 빈자리를 받아들이지 못한 나머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병원에 실려 가기까지 했던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데도 왜 수화기를 들지 못 하나. 아마 제 맘 어딘가 또아리 튼 꿈 때문일 것이다. 이마에서 줄줄 흐르는 피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양 가만 선 채 투명한 별빛처럼 웃던 그가, 세이라와의, 연락을, 막았다. 우스운 일이지, 생사여부도 불투명한 사람이 확실히 산 자들의 커뮤니케이션을 막다니. 이 말을 듣는 순간 와, 정말 미쳤구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일갈할 카이가 상상돼 푸으, 바람 새는 듯한 웃음이 새었다.
샤아 아즈나블은 그 곳에서 죽었을까.
아마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어디에 있을까.
폐허가 된 지온에? 라라아가 머무는 우주에? 세이라 씨의 집 옆에?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샤아 아즈나블은 어디 있을까! 폭발한 생각 새로 똑똑, 도움이 필요하냐 묻는 듯한 노크 소리가 비집어 들었다. 네, 누구세요. 웃음소리가 났다.
“너 방문하기로 한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냐?”
“카이.”
서둘러 문을 열었다. 후욱, 우악스레 달려들어 숨통 막은 공기를 애써 뿌리친 아무로는 찌득한 방바닥에 다시 제 맨발을 올렸다. 일찍 왔네, 나도 방금 전에 왔는데. 카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가? 뭐 상관없잖아, 어차피 너 있었고. 들락날락 썰물처럼 밀려든 공기가 자꾸 등을 쳤다. 철썩, 철썩... 파도처럼 몸 철썩이다 다시 제게 달려든 파도를 옆걸음으로 피하고는 미안한데 카이, 문 좀 닫아 줄래, 딱딱히 말했다. 아, 미안. 깜박했네. 달칵, 파도가 잠긴다. 귓가가 조용해졌다. 다시 자리에 앉은 아무로의 얼굴을 말끄럼 보던 카이가 아무로, 괜찮은 거지? 답잖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다마다. 늘 괜찮았으니 할 말 해, 너 할 말 있다 했었잖아. 모든 불안과 불균형을 캐치하는 눈을 가진 상대에게 최대한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해 방어 태세 취한 저를 눈치 챘는지 카이는 오늘 너 타박하러 온 거 아니야, 편안히 있어. 네 집이잖아, 말을 쉬었다. 네 앞에서는 편히 쉴 수 없어. 마침표가 찍히기도 전에 숨이 터졌다. 넌 정말 재수 없어, 알아? 의자 등받이를 걷어잡은 하얀 수트가 서걱히 꿰낸 말이 식탁 위로 올랐다. 요즘도 약 먹어? 흘끗, 턱으로 가리킨 약 봉투가 빳빳했다. 먹는구나. 툭툭, 그가 식탁을 한 번 털었다.
“아무래도 얘기 중에 피자 같은 건 먹기 힘드니까 스시 사왔어.”
“고마워.”
“접시만 하나 좀 갖다 줘, 간장 붓게.”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등을 보던 카이가 세이라 씨와 연락은 해봤어? 올해도 안 할 셈이야? 던진 물음에 달려온 건 모르겠어, 아마 올해도 못하지 않을까 라는 답이었다. 언제까지 연락 안 할 건데, 이제는 연락할 때도 됐잖아? 벌써 3년이라고, 3년. 만약 세이라 씨가 네게 화가 나 떠난 거였다 해도 지금쯤 잊었을 거야. 물론... 음... 세이라 씨는 아름다운 만큼 독한 여자지만... 그래도. 덜컥, 덜컥, 입 벌렸다 닫았다 우는 천장 아래서 흔들거리던 몸이 별로, 지금은 연락 못 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지금 전화해봤자 서로 상처만 줄 거야, 아니지, 이번에도 내가 일방적으로 상처 주겠지. 내가 온전한 인간이 됐을 때 전화하고 싶어, 소리를 뱉었다. 카이는 답답했다. 저 정도 인간이 왜 이렇게 살지, 하는 생각도 수억 번 했다. 기묘한 신조를 떠안고 사는 기묘하게 고결한 아무로 레이. 제 딴에는 생각한 것일 테지만 보는 사람들은 아주 속이 터졌다. 달리 말릴 방법이 없어 더 그랬다. 푸우, 결국 냉장고에 넣어두려던 미지근한 맥주 캔을 딴 카이에게 손을 내민 아무로가 나도 한 캔 줘, 너만 마실 거야? 했다. 미지근해. 상관없다는 듯 손을 위아래로 털었다. 손바닥에 맥주 캔이 와 닿은 뒤에는 한참 꼴꼴대는 소리만 오갔다. 입을 연 건 카이였다.
“요즘 뉴스는 보냐.”
“안 봐.”
“라디오는 듣냐.”
아무로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딱 봐도 고장 난, 먼지 쌓인 라디오가 있었다. 고장 난 걸 왜 안 버렸어! 분노하는 상대와 다르게 아무로는 미니 선반 대용으로 쓰기 좋아서, 조용히 웃었다. 이러니 세상에 뒤떨어지지. 퍽, 카이의 젓가락이 가른 광어 살 사이서 와사비가 피처럼 솟아올랐다.
“상관없어, 어차피 나는 잊혀 져야 할 사람이야. 내가 세상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면 다들 또 전쟁을 기억해내고 말아, 1년 전쟁을 되새기고 말아. 나는 도태되어야 해, 카이.”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왜 도태돼야 해? 1년 전쟁은 끝났어, 그것도 6년 전에. 요즘 누가 1년 전쟁 얘기하디? 중학교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야 하겠지, 6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릴 때였죠? 이런 멘트와 함께. 전쟁을 간접적으로 겪은 일반인들은 이미 잊었어, 내가 1년 전쟁 참전자라는 것도 다들 몰라. 너는 좀 유명해서 아직도 다들 알아보는 거라지만...”
“6년째 좀 유명하지.”
푹, 젓가락 날이 참치 살을 베었다. 아무로, 요즘 너 알아보는 사람 그리 많지 않아, 네가 의식해서 그래. 왜 그러는 거야? 전쟁 유명인 노릇이 좋아? 아니잖아, 네가 그런 성격 아니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지. 넌 그저 조용히 살려 할 뿐이었잖아, 늘. 지금 생활도 조용하긴 해, 그렇지만... 비쩍 마른 손과 참치 살을 번갈아 보던 파란 눈이 그 얘기하러 온 건 아닐 텐데, 카이. 조금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얘기하러 온 거 아니잖아, 뱅뱅 돌리지 말고 본론부터 말해. 한때는 참치 몸뚱이였을 살 조각에 꽂힌 젓가락이 바르르 떨었다.
“샤아 아즈나블, 기억해? 세이라 씨의 오빠.”
손가락은 몇 번 허공을 움켜쥐었을 뿐 크게 뜨인 눈은 덮어주지 못했다. 기억...하지, 그를 어떻게 잊겠어, 내가. 라이벌인 걸로 모자라 세이라 씨의 오빠, 날 우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든 여자가 사랑하기까지 했던 남자를 어떻게 잊어. 바싹 마른 카이의 입술이 빈정거림 싹 빠진 어투로 걔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아? 모르지? 나는 알아, 내쉰 목소리가 단단했다.
“알아?”
“관심이 지대해 보이네.”
“지대하지, 내 라이벌 겸... 어쨌든 어떻게 안 거야? 살았어? 죽었어? 살았지?”
“네게는 죽어야 더 좋은 거 아니야?”
그렇기는 했으나 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서도 안 됐다. 왠지 죽지 않았을 것 같아, 그 말에 천천히 몸 숙인 카이가 눈을 번뜩 빛냈다.
살아 있어, 그것도 아주 잘.
아, 살았구나. 카이는 왠지 마음이 놓여 멍청한 얼굴로 살았구나, 그렇구나... 어떻게 안 거야, 묻지 않느니만 못한 말을 한 아무로의 얼굴에 글쎄, 다 방법이 있지. 그 녀석이 6년이나 잠자코 산 탓에 늦었을 뿐이야, 지금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찾아냈을 거라고, 손가락을 튀겼다. 언론인이란 무시무시한 것이로군, 앞으로 까불지 말아야 겠어, 생각하는 아무로를 눈 두 쌍이 흘끗 흘겼다. 미안한데 네 뒤를 캐지는 않아, 캘 것도 없고. 네 뒤 캐봤자 아무로 레이, 왜 결혼하지 않는가? 이딴 기사밖에 못 내. 과거 1년 전쟁 영웅 님이 왜 결혼을 못하는가, 이런 내용을 사람들이 궁금해 하겠어? 별로 세상에 도움 되는 정보도 아니고. 자의식 과잉은 정말 넣어두는 게 좋아. 마른 손가락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녀석, 어디 살고 있을 것 같냐?”
“누구, 샤아?”
당연히 걔겠지, 어디 있을 것 같아? 대답 없이 참치 살만 씹어대는 거친 입술을 보다 너한테는 이런 화법 안 쓰는 게 좋겠다, 영원히 침묵만 기세네, 질렸다는 듯 두 손을 든 카이에게 뭘 바란 거야? 웃어보였다. 적어도 글쎄, 나 몰라, 정도는 바랐지. 낄낄, 식탁 가득 오른 웃음이 고장 난 라디오 스피커를 울렸다.
여기 살아.
숨이 멈췄다. 뭐? 홱 돌아간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여기 산다고, 샤아 아즈나블이. 꽤 오래 됐어. 왜 눈에 안 띄었냐는 질문하려 그랬지? 안 띈 게 당연해, 도시 끝나는 지점 즈음에 살 거든. 네 집은 시가지에 있잖아? 여기저기 활달히 다니는 타입이 아닌 네가 봤을 리 없지. 그 녀석은 네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여기에 자리를 잡았고. 이 넓은 도시에서 어찌 마주하겠느냐 생각한 거겠지, 정말 웃기는 자식이지? 웃음 흘린 카이의 팔을 붙잡았다. 그 녀석, 어디 있어? 어느 쪽? 서쪽 끝? 동쪽 끝? 남쪽 끝? 식탁에 올랐던 웃음이 작은 동공 속으로 빨려든다. 다 틀렸네요, 북쪽 끝. 품에서 꺼낸 지도를 홱 펼쳐 든 손이 자, 여기, 몇 십 미터 뒤 숲이 있어 덜 발전됐다는 소리 듣는 곳을 가리켰다. 여기 살아. 자연친화적인 녀석이지? 불편하지도 않은 모양이야, 하기사 전화 한 통으로 모든 걸 살 수 있는 시대인데. 집밖에 잘 안 나온대, 얼굴 본 사람도 몇 없다나봐.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봤어. 저 집에 사람이 사는 건 확실하나 얼굴은 본 적 없다, 다들 그러더군. 아, 한 명은 봤댔다, 근처 사는 어린애. 별 같은 금발을 가진 키 큰 남성이었다 했어. 목소리가 아주 좋아서 기억했다고. 증거 충분하지? 입을 벌려 숨을 토해도 토해도 가슴이 가빴다. 뻐근했다, 묵직했다.
샤아 아즈나블이 살아있다, 그것도 제 가까이.
거친 입술을 누르던 손이 결국 피를 냈다. 진정해 아무로, 그 녀석은 도망가지 못해, 그럴 생각도 없어. 그 녀석 여기 언제 정착했는지 알아? 입술 거스러미보다 거칠게 일어난 목소리가 몰라, 짧게 답했다. 몰라, 나는 네가 아니야, 카이. 카이는 현명한 사내였다, 적어도 아무로가 감정조절불능 상태까지 가게 놔둘 남자는 아니었다.
“4년 전.”
“4년 전? 세이라 씨가 있을 때잖아?”
그가 하나뿐인 제 여동생 세이라 씨 때문에 왔는지 그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라이벌인 너를 보러 온 건지는 아무도 몰라, 확실한 건 세이라 씨가 이사한 지 3년이나 지났는데도 계속 여기 있다는 거지. 마른 손에서 돌다 툭, 식탁으로 떨어진 젓가락 쪽으로 시선 내린 아무로를 보던 카이가 만날 생각 있어? 그럼 약도 줄게, 확실히 그 녀석 집거야, 다른 지도를 하나 꺼냈다. 퍼런 눈이 상대를 쓸어 올랐다.
“왜 주는 건데. 이유 없이 이러는 사람 아니잖아.”
“맞아, 이유 없는 선의는 베풀지 않지. 악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런데 왜, 그 물음은 감시역이 필요해서야, 너 말고 그를 감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버석한 문장에 막혔다. 벌써 6년째 얌전하다고는 해도 휴화산인 그가 언제 폭발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언젠가는 폭발할 거야. 그게 언제인지는 아무도 몰라. 연방 명령으로 온 거 아니야, 연방 명령은 이제 지긋지긋하거든. 그냥 이건 내 개인적인 부탁이야, 브라이트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언론인 명예를 걸고 거짓이 아니라 맹세하지. 내 개인적인 부탁이야, 그래서 전화로 말하지 않은 거고. 만약 연방 부탁이었으면 전화로 얘기했겠지, 기록 남아야 하니까. 연방 정보원도 같이 왔을 테고. 이번 일이 커지지 않길 가장 바라는 사람이 나일 거야, 의심하지 마. 네 기량이 녹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녀석도 녹슬지 않았을 거야. 다이쿤 가 장남이자 붉은 혜성인 그는 언제나 지온 잔당 군 영입 1순위 대상일 거다, 네게 한 방 먹었다지만 그 명성은 어디 가지 않아,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이곳에서 감시역과 방어선 역이 동시에 가능한 사람은 너밖에 없어, 아무로. 갈빛 속눈썹이 껌벅, 껌벅, 두어 번 공기를 쓰다듬었다. 6년이나 잠자코 있었다며, 왜 그럴 거라 생각하는데. 동시에 푸우,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왜 그럴 거라 생각하냐고? 녀석은 너무도 순수하거든, 믿기지 않지? 화이트 베이스 크루였던 내가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사실인 걸 어떡해, 녀석은 정말 순수해. 그 정도로 순수한 녀석 찾기도 드물 거야. 그 예쁜 머리통 속에는 어떻게 세계 평화를 이뤄 사람들이 제 따뜻함을 펼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가득해. 다툼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야! 그 상냥함은 가끔 이상한 곳으로 튀어 1년 전쟁 같은 일을 만들곤 하지, 상냥한 전쟁을 할 수 있는 괴상한 녀석이다. 그 상냥함과 따스함에 감복한 사람들은 그를 따라 성전을 하게 되지. 무시무시해, 샤아 아즈나블은. 그 의지는 감시받아야 해, 어딘가 뒤틀린 상식을 가진 녀석에게는 너 같은 상식인이 필요해, 인간을 믿는 동시에 아무도 들이지 않는 너 같은 녀석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꿈질꿈질, 부딪히던 손가락 틈새로 한숨처럼 흐른 그래?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해, 녀석은? 사람들 없는 곳에 살 더니 여즉 그런 메르헨에 취해 있구나, 놀랍네. 아니, 놀라운 일은 아니야. 세이라 씨가 말한 녀석이나 네가 말한 녀석이나 내가 들은 녀석이나 똑같아... 일맥상통해. 여전하네, 샤아는. 흐른 피곤한 숨을 카이는 놓치지 않았다.
“갈 거지, 녀석한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잖아, 내게 얘기를 들은 너는 갈 수밖에 없어.”
“처음부터 그걸 노렸잖아, 카이. 샤아 얘기를 들은 내가 가만있을 줄 알았어?”
“물론 생각지도 않은 시나리오였지. 내 말을 들어줄 거라 생각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샤아를 그려온 듯한 널 보고 놀라기는 했지만 그때 확신했지, 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걸.”
흐흐, 웃는 카이를 보다 천천히 일어난 아무로가 갈게, 하지만 가서 확인할 거야. 녀석이 위험인물 같지 않을 경우 감시는 그만 둘 거야. 나는 사람 감시하는 취미 없어, 내가 당한 것으로 족해. 우울히 떨군 말이 집 곳곳에 곰팡이처럼 들러붙었다. 글쎄, 너는 샤아를 만난 순간 그를 시야 밖으로 떨굴 수 없게 될 거야, 맨날 만나러 갈 걸? 자연스러운 감시가 되겠지, 잘 해 봐 아무로. 여기 자세한 약도 있다. 식탁에 약도 하나 둔 채 잘 있어 아무로, 잘 지내라.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해, 빠져나가는 등을 보며 아무로는 카이가 틀린 적은 없다, 정말 난 그리 될까? 생각했다. 퍼런 눈이 식탁 쪽으로 돌았다. 약도와 찢어진 참치 살.
그 날 늦은 시각 집을 빠져 나와 움직이기 시작한 아무로의 차바퀴는 약도에 동그라미 쳐진 곳으로 흘렀다. 샤아, 샤아 아즈나블... 머릿속을 꽉 채운 이름이 저를 조종하는 것만 같아 지끈지끈 걸리는 심장을 붙들고 속도를 올렸다. 그를 만난다 해서 고장 난 제가 고쳐지는 것도 아닐진대. 얼마나 달렸을까, 부드러운 도로 끝으로 반짝반짝한 마을이 보였다. 숲을 보니 약도가 이른 곳이 맞는 모양이었다. 아직 왁자한 기가 남은 마을 가운데를 달려 샤아가 산다는 숲 시작 지점까지 갔다.
샤아가 여기 있다.
끼익, 차를 정차시켰다. 발걸음 마다마다 낙엽 씹히는 소리가 났다. 똑똑, 노크 소리가 유독 컸다. 깜박깜박, 노란 눈 깜박이다 누구세요? 물은 집 문을 부여잡았다. 기억에 화상이 든다, 가슴이 뜨겁게 달았다.
정말 샤아다, 샤아 아즈나블이다. 언젠가 제게 나는 캐스발 렘 다이쿤이야! 외쳤던 그다.
누구세요? 장난은 싫습니다, 시킨 것도 없고요... 용건 말씀해주세요. 그 목소리에 간신히 안녕, 샤아, 했다.
안녕, 샤아.
풀이 울었다. 한참 뒤에야 내리 앉은 침묵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안녕, 아무로. 딸각, 입 벌린 집에서 흐른 별이 오랜만이구나, 속삭인다.
“아, 키 컸네 아무로 군.”
스물아홉 샤아 아즈나블이 웃었다, 반짝반짝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