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로 레이 x 샤아 아즈나블 재록본 수록 목록
아무로 레이 x 샤아 아즈나블 재록본 수록 목록
비밀 데이트 (1306) : 그리프스 항쟁 시절, 아무로 x 크와트로
의지 (130607)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결혼 (130612)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Cooking Cook Coop (130625) : CCA 이후 연방의 감시 아래 동거하는 둘.
32번째의 단어 (131120) : CCA 이후 연방을 피해 숨어서 사는 둘. 의사 카미유 등장.
Say cheese (140119) : CCA 이후. 살인 소재.
밤 (140121)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아무로와 시한부 샤아.
Kiss crevasse (140122) : CCA 즈음.
Please SOS (140125) : CCA 이후. 자살+살인 소재
You are not evil, not a devil, not a monster (140211)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Runaway, Don't go away, I'll catch you (140302)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Lost thing (141007) : CCA 이후. 자살 소재.
Let me in (141009)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죽은 별 (141208)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소리 방울 (141231) : CCA 이후 동거했던 둘. 사망 소재.
New year bride (150102)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Crush Rush baby (150102)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19↑
정체자 (150118)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BUBBLE BUBBLE (150217) : 그리프스 항쟁 시절. 아무로 x 크와트로.
Round Round day (150511)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우그러드는 밤 (150517)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아무로와 시한부 샤아.
꽃은 여전히 아름다울까 (150613) : CCA 이후, 아무로만 살아남았다는 설정.
섬세한 겨울 (150714) : CCA 이후 아무도 없는 콜로니에서 동거하는 둘.
EVER AD BALLOON (150826)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범죄 사이 (161003, 161108 / 上下편 구성) : AU. 살인청부업자 아무로와 사진작가 샤아.
Layday birth (161127)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콘돔과 남자와 남자 (1801~02)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아무로를 증오하는 샤아와 샤아를 사랑하는 아무로. 19↑
Think pink (1802~03) : CCA 이후 동거하는 둘. 자살 소재. 19↑
+일부 편에 대한 단상, 총후기, 들은 음악
짧은 편은 5p, 긴 편은 110p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3~14년도 글들은 대부분 5~10p 이내이며 15년도 글들은 20p 이내, 16년도 글들부터는 대부분 50p 이상입니다.
CCA 이후 스포일러가 대단히 많습니다. 총 630~640페이지 예상.
섬세한 겨울 윗쪽의 글들은 http://lastgravity.tistory.com/ ←여기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클릭하시면 새창으로 열립니다.
콘돔과 남자와 남자, Think pink, 넘어진 우주 샘플은 아래 따로 첨부합니다.
샤아는 섹스를 못한다.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적당히 분위기를 돋우는 법도 모르거니와 신음도 내지 않는다. 삽입하는 순간 살짝 허리를 들어주는 배려는 언감생심이다, 욕심도 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마냥 나무토막 같지는 않다, 따뜻할뿐더러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줄 줄은 안다. 키스할 때 입술을 벌려주기는 한다는 얘기다. 허나 리드하는 이에게 너무 많은 선택권을 넘겨준다. 섹스는 둘이 함께 하는 행위일진대 마치 넣는 쪽한테 모든 권한이 있다는 양 구니 좀처럼 흥이 나질 않는다. 저만 발정 난 짐승이 된 느낌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분명 한참 몸을 섞었을진대 영 한 것 같지가 않아 나 잠깐 담배 좀 피고 와도 되냐, 조용히 묻는다. 송골송골 맺힌 땀을 보건대 분명 하기는 했다. 샤아는 이미 눈을 감은 채다, 제 2차 네오지온 항쟁이 끝나고서 그는 무척 약해졌다. 더 이상 스페이스노이드를 일 필요가 없어져 그런지도 모른다. 반평생 연방을 지켜온 아무로조차도 샤아가 34년 간 매일같이 느꼈을 부담감은 짐작하지 못한다. 할 수도 없다, 왕자나 같은 지위였건만 어찌 안단 말인가. 아무리 많은 짐을 졌었대도 아무로는 어디까지나 군인이었다, 언제든 도망칠 수 있었다. 허나 샤아는 아니었다. 고귀한 혈통을 타고나 늘 최전선을 지켰다, 총탄이 날아드는 가운데서도 단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스페이스노이드를 지키라는 명을 받았으므로 몸 사릴 생각 따위는 하덜 않았다 했다. 샤아가 사랑하는 유일한 혈육이자 한때 아무로와 사랑을 나눈 세이라 마스는 그런 오라비를 마음 깊이 증오하면서도 꽤 동정했다. 기실 그러지 않기도 힘들었다, 스스로를 갈아 스페이스노이드가 자생할 자양분을 만드는 남매를 가만 지켜보기는 힘들었을 터다. 오빠를 죽여 달라 부탁하고서도 1년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줄곧 그림자를 좇은 세이라 마스다, 미련을 쉬이 버릴 수 있었을 리 만무하다. 냉정한 성미를 지녀 한 번 판단을 내릴 경우 망설이지 않았던 세이라도 샤아한테만은 몇 번이고 결정을 번복할 만큼 우유부단했다. 결국 끊어내기는 했지만 그 본인도 큰 상처를 입었다. 1년 전쟁이 끝나고서도 한동안은 샤아가 남긴 흔적을 찾았다. 오빠가 살아있는 것 같아, 하긴 죽을 사람도 아니지. 그런데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어. 왜 또 내 앞에는 나타나지 않는 걸까? 오빠는 늘 그래, 날 생각해주는 척하면서 늘 이기적인 짓만 해. 남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할 이야기도 넋두리처럼 했다. 본인도 추태라고는 생각했는지 며칠 지나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그 즈음 연방 감시가 심해진 탓도 분명 있을 것이다. 전쟁 판도를 뒤엎을 힘을 가진 존재가 뉴타입임을 깨달은 연방은 살아남은 뉴타입들을 지독히 추적했다. 세이라 마스와 아무로 레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온병사들을 퇴각하게 만든 아무로는 S급 주요인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연방 고위관료들이 쥔 권력을 위협할 경우 어떤 공을 세운 인물이든 남모르게 숙청되거나 감금되었다. 아무로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이라에게도 미행이 따라붙었다. 이게 무어냐 항의한 아무로와 달리 세이라는 꽤 여유를 보였다. 나, 어릴 때는 늘 사람들 시선 받으면서 살았거든. 알테이시아 님이라면서. 오히려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야. 그 추억 속에는 분명 샤아가 있을 터였으나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서로 상처 입을 뿐이었다. 그렇게 2년여가 흐른 어느 날 세이라가 헤어지자 했다. 여느 날과 같은 담담한 낯이었다. 언뜻 차갑게까지 보여 왜 헤어지자는 겁니까, 같은 당연한 물음마저 던지지 못한 채 안절부절 하는 아무로를 보던 세이라가 도통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이네, 긴 손가락을 자르륵 움직였다. 하얀 가락이 식탁 유리를 통, 통, 치는 순간마다 의식도 툭툭 튀었다. 번쩍번쩍 점멸했다 돌아오는 시야 사이서 세이라만이 온전했다. 누구도 그만은 침범치 못할 것이었다, 샤아조차도 건드리지 못할 이를 해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로 군한테는 내가 첫 번째가 아니잖아, 라라아 슨이지. 누군지는 묻지 않을게, 궁금하지 않으니까. 평정을 유지하지 못해 제가 그 이름을 불렀습니까, 주먹을 쥐었다간 폈다. 손가락이 달달 곱아들었다. 응, 거의 매일. 누구일까 생각해봤는데 역시 모르겠더라고. 말했다시피 그닥 궁금하지도 않고. 투명한 눈 가득 담긴 저는 새하얗게 질렸다. 단순히 파란 색을 덧입어서는 아닌 듯해 몇 번 마른세수를 하자니 추궁하려는 거 아니야, 난 마음정리 다 했거든. 이제 너와 더 이상 사귀기 싫어, 입매만 올려 웃었다. 세이라 씨, 부르려다가 그만 두었다. 입도 벙긋 못한 채 고개 숙인 아무로가 우스우면서도 가여운지 금빛 눈썹이 무딘 산 형태를 그렸다. 아무로 군을 원망하지는 않아, 따뜻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울컥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미 잊은 일로 아무로 군마저 괴롭히기는 싫어, 그런 취미도 없고. 그 다정함이 자신을 더 괴롭힌다는 사실을 알까, 꺽꺽 들이치는 울음을 식탁 한가득 쏟아놓았다. 검게 죽은 소리들이 비척비척 흔들리다 죽었다. 달래주는 대신 작게 한숨을 쉬고는 일어나는 손을 잡을 방도는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세이라 마스는 자유로워져야만 했다. 계속 함께였어도 좋지 못한 꼴만 봤을 터다. 아무로 군, 우리는 끝이야. 난 오늘 여길 나갈 거야. 당시에도 세이라는 괜한 희망을 주는 성격이 못됐다. 타고난 성정일 것이다, 샤아가 죽은 아버지에게서 책임감을 물려받았듯 그는 강단 있는 성미를 받았다. 난 이제 첫 번째 아닌 위치는 견디지 못하겠어. 너 때문은 아니야, 하지만 이 성격으로는 너와 잘 지내지 못하겠구나. 잘 있어, 아무로 군. 건강하렴. 그게 마지막이었다. 본디 자존심 강하거니와 고고한 세이라는 또 두 번째가 되기는 싫다며 떠나버렸다. 차마 전화를 걸 엄두도 내지 못하여 그냥저냥 살았다. 한때 동료인 카이 시덴이 그래도 전화는 한 번 걸어봐야 하지 않겠냐, 세이라 씨도 이젠 너 반가워할 걸? 꽤 무료하신 것 같던데, 몇 번 부추겼으나 인두겁을 쓴 이상 그래서는 안 됐다. 염치까지 잃어서야 짐승뿐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무료하게 살던 어느 날 다시 샤아가 나타났다. 한 톨 빛도 잃지 않은 채 화려한 모습을 뽐내는 샤아를 본 순간 숨통이 트였다. 샤아, 샤아 아즈나블. 그가 제 색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깨닫지 못하기도 힘들었다. 샤아를 보기 무섭게 온 숨구멍이 열렸건만 모르는 쪽이 이상했다. 그러나 납득하지 않았다, 깨달음과 인정은 별개다. 샤아는 그저 동료일 뿐이라 스스로를 부단 설득했다. 옛 숙적을 좋아한다고? 그보다 미친 짓이 있나? 만약 카이 시덴이 들었을 경우 와, 아무로 너 진짜 미쳤구나? 단단히 미쳤네, 전쟁 너무 한 거 아냐? 아무래도 브라이트한테 수정 몇 번 더 당해야 할 것 같은데? 진즉 혀를 내둘렀을 터이나 안타깝게도 아무로는 감정 숨기는 데 재주 넘쳤다. 재능보담 재주 혹은 기술이라 불러야 더 옳을 터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참았다. 곧 지나갈 열병이니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나는 쪽이 좋겠다며 자기 자신을 다독였다. 물론 틀렸다. 샤아를 잊지 못한 나머지 많은 이들에게 추태를 부렸다. 욕을 먹지 않아 더 괴로웠다, 그들은 아무로가 아직 1년 전쟁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분명하다 판단해 그저 아낌없는 동정만을 보여주었다. 이용당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 모습을 보자니 가슴 한 구석이 뻑적했다. 나는 이다지도 많은 사람을 속였는가, 아파보이는 모습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마당 한가운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용 구덩이를 팠을 것이다. 환부 없는 통증을 겪는 아무로를 꿰뚫어본 이는 벨토치카 이르마였다.
(후략)
아무로, 난 내일 모레 죽을 생각이다.
딴에는 퍽 고민했다 싶어 어쩌다 그런 결심을 다 했어? 언제 한 거야? 물으니 며칠 전? 눈을 한 번 끔벅였다. 그 모습이 꼭 갓 잡힌 물고기 같아 그래, 마주 꺼풀을 깜박인다. 이제 더 이상 살기 싫어? 물은 아무로한테서 시선을 뗀 샤아는 여느 때처럼 평온하다. 기실 샤아는 본인이 엑시즈와 함께 부서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늘 저런 상태였다. 스스로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최근에야 아즉 숨이 붙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런 때가 오리라는 짐작은 했었다,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지만서도 놀랍지는 않다. 샤아는 지구에서는 살지 못할 인류였다. 수없이 상황을 상정해봤기 때문인지 그리 화가 나지도, 답답하지도 않아 더 살 마음은 안 들어? 가만 물었다. 나랑은 살기 싫은가? 담백히 물은 아무로와 다시 시선을 맞춘 샤아가 넌 좋은 동거인이지, 아주 요점은 아닌 답을 냈다. 분홍색 혀 끝은 조금 갈라졌다, 지구낙하 때 잃어버린 살점이다. 결국엔 찾지 못했다, 불타버리거나 수장됐을지도 모르는지라 감히 찾을 엄두도 못 냈었다. 하지만 나는 그만 살래. 피곤해. 샤아가 아홉 살 무렵부터 서른넷까지 줄곧 고생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인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온 즘 다이쿤이 죽고서 샤아는 줄곧 지구와 우주를 맴돌며 이방인처럼 살았다, 뿌리 없이 떠돌았으니 사람 냄새를 풍기지 못하기도 당연했다. 샤아는 결국 누구에게도 인간은 되지 못했다, 아무로 역시 샤아를 완전히 사람이라고는 여기지 못한다. 벌써 만난 지 16년 차인 아무로조차도 그렇건만 뭇 평범한 이들이 샤아를 같은 인간으로 볼 리 만무했다. 네오지온 사람들은 제 2차 네오지온 항쟁 이후 실질적 사망처리나 마찬가지인 행방불명선고를 받은 샤아를 신처럼 떠받들었다. 죽음이 사람을 더 신성하게 만든 경우였다. 지온이 국부라면 샤아는 수호신이었다. 캐스발 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거야, 계속 항전하자! 이대로 무너지지는 못한다! 언제까지 저 연방놈들에게 굴복할 텐가! 이런 굴욕 더는 못 견딘다! 뜻은 좋았으나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잃은 스페이스노이드들은 바람 앞 등불처럼 스러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부 레지스탕스 이외에는 모두 잠잠해졌다. 그 모든 비참한 상황을 접하면서도 샤아한테는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건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빠졌다. 어차피 알았어도 이런 몸으로는 MS를 타기는커녕 분개밖에는 더 못했을 테지만 후회되기는 했다. 지금 말해줘 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터이므로 그냥 스패너만 몇 번 돌린다. 그래, 그렇구나. 하긴 너 고생 많이 했지. 이 이상 멋진 말은 떠오르지 않아 기름내 나는 손 들어 코 밑만 한 번 닦는다. 그래도 노고는 인정해주는구나, 아무로 군. 너한테 인정받을 생각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기쁘군…. 새벽 가로등 불빛이 거실을 은은히 물들인다, 이만 자야 할 듯해 내일은 뭐 할래? 마지막 날인 셈이잖아, 다리를 끌어당겨 앉는다. 무릎에서도 퀘퀘한 기름내가 나는 듯해 코를 몇 번 킁킁거린다. 글쎄, 잠시 생각한 샤아가 아, 조금 웃었다. 못해본 것들을 해볼래. 어릴 적부터 줄곧 정치와 군사 분야만 파온 샤아가 해보지 못한 일은 퍽 많을 터였으므로 그래? 그럼 삼박사일 이상 걸리지 않겠어? 턱을 괴니 그러니까 엑기스만 뽑아야지, 제법 쾌활하게 말한다. 이렇게 즐거워하는 샤아를 보기도 오랜만이라 그럼 적어봐, 할 수 있는 건 같이 해줄게. 웬만한 건 다 들어줄 테니까,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다행히 형편없이 떠는 추태는 보이지 않았다. 친절하구나, 아무로는. 마치 영생을 살 사람처럼 말하며 펜을 돌리는 높다란 콧대를 보다 곧 죽을 사람 부탁을 못 들어줄 건 또 뭐 있냐, 무릎과 옆얼굴을 맞댔다. 그렇군, 터지듯 웃은 샤아가 그럼, 짐짓 미간을 찡그린다. 금빛 눈썹 두 짝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멀어진다. 너도 알다시피 난 지온 즘 다이쿤 아들로서 모범이 될 일만 했거든, 게임센터 같은 데는 꿈도 못 꿨어. 군것질도 많이 못했지, 알테이시아는 꽤 했지만. 그 애, 단 거 좋아하지 않든? 세이라와 헤어진 지도 어언 20년 가까이 되었건만 그런 게 기억날 리 만무해 글쎄, 내 앞에서는 늘 홍차를 마셨는데. 단 거 먹는 모습은 거의 못 봤어, 인상을 찌푸리니 그새 입맛이 바뀌었나, 또 펜을 돌린다. 손등을 가로지른 흉은 꽤 짙다. 뭐, 그럴지도. 세이라 씨는 어른스러웠으니까. 늘 홍차나 커피를 마셨고. 나, 근 3년 간 사귀면서도 결국 세이라 씨랑은 말 못 놨거든. 어쩐지 계속 존댓말을 쓰게 되더라고. 샤아는 제법 놀란 얼굴을 한다. 파르란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그래? 알테이시아는 나름 붙임성이 좋은 아이였는데. 네가 붙임성이 없어서 그런가? 정말 금시초문이다. 세이라는 위압감은 있어도 친근감은 부족했다. 위엄 있는 외모와 분위기 탓일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화이트베이스 승무원들 중 그를 편하게 여긴 이는 거의 없었다. 존재치 않았다는 말이 더 적당할 터라 눈을 반쯤 내리 감으니 많이 변했겠지…. 세월이 흘렀으니까, 그립다는 양 웃는다. 세이라 씨한테는 전화하지 않아도 돼? 너 내일 모레 죽는다며. 알면 슬퍼하지 않을까. 대번 고개 저은 샤아가 이제는 나보다 네가 알테이시아를 더 잘 알 것 같은데? 뺨을 때렸으면 때렸지 슬퍼하지는 않을 걸, 나른히 엎드린다. 날씬한 등을 덮은 낙낙한 니트는 새까만 색이다. 척추 선을 따라 둥글게 주름이 졌다. 그리고 걘 이미 내가 죽은 줄 알잖아, 아무로 네 생사조차 모르는 애한테 굳이 연락할 필요 있나. 게다가 자칫 네가 살아있다는 걸 들킬 지도 모른다고? 짐짓 심각하다는 듯 인상을 쓰더니만 아, 곧 말갛게 웃는다. 하긴, 네 문제는 나지. 내가 없으면 숨지 않아도 돼. 그리프스 항쟁 시절보다 조금 더 긴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기고는 재차 펜을 돌린다. 긴 손가락 사이서 하얀 잔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아, 그래서. 나는 해보지 못한 게 많아서 사실 뭘 먼저 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 게다가 청소년기에도 줄곧 사관학교에 있었으니까. 군사 관련된 일이라면 질릴 만치 해봤지만… 너는 뭘 했나? 그래도 열다섯까지는 좋아하는 일을 했겠지? 생긋 웃는 얼굴을 보다 나도 별 거 안했어, 동그랗게 오른 무릎을 쓰다듬듯 쓸었다. 거의 매일 기계나 봤지. 그게 좋았고 그 외에는 별로 할 것도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건담을 만든다고 늘 바빴거든, 대체로 혼자 있었지. 네 말마따나 난 사회성도 크게 좋지 않고. 퉁명스레 말한 아무로와 눈을 맞춘 그대로 웃은 샤아가 아, 신경 쓰는군. 사회성 부족하다는 말 말이야, 부드럽게 웃고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제 볼을 몇 번 쓰다듬고는 다시 엎드리는 모습이 꽤나 생경해 갑자기 뭔 바람이 불었냐. 내일 죽을 거라서? 저도 몰래 더욱 불퉁히 말하니 그래서겠지, 따스하게 웃는다. 이틀 쯤은 솔직해도 되잖아? 계속 펜만 돌리는 손가락을 응시하다 빨리 적기나 해, 고개를 젓는다. 생각 중이야. 난 보통 어린애들이 뭘 하는지 모른다고. 난 군에만 있어서 민간 어린애들이 어떻게 노는지 전혀 몰라. 오히려 이쪽은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그리 물어봤자 아무로 역시 아는 바가 전무하다시피 하다. 프라우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요리를 좋아했으며 하야토는 그런 프라우를 쫓아다니느라 바빴다. 지금은 유명 저널리스트인 카이 시덴 또한 그 시절에는 장난꾸러기를 넘어 불량한 어린애였기에 생판 모르는 사람 차를 탈취해 놀러가거나 했었다. 지금 와서 차량을 도둑질하기도 애매하지 않은가, 곰곰 생각하는 아무로가 재미있는지 샤아는 모로 누운 채 계속 샐샐 눈웃음 쳤다. 나도 잘 모르겠다, 기계만 만졌다고 했잖아. 절로 모인 미간 새를 꾹꾹 누르며 뱉듯 얘기한다. 이 사이사이 걸린 소리를 혀 세워 긁어낸 다음 굳이 국한시킬 필요는 없잖아? 꼭 어릴 때 못해본 거여야 해? 파르란 눈과 시선을 맞댄다. 아무로를 담은 그대로 살풋 내렸다 오른 동자가 그렇지는 않지, 그럼 더 생각해볼까? 마치 본인은 제삼자라는 양 미소 짓는다. 샤아는 무언가 흡족할 시 꼭 저렇게 배부른 고양이처럼 입매를 올리고는 한다. 지금 당장은 죽기밖에는 하고픈 게 없어서…. 기분 잡쳐놓기는 덤이었다. 눅눅히 눌어붙은 기분 탓인지 점점 축 처지는 몸뚱이가 느껴져 나 먼저 씻는다, 일어나니 아, 오늘은 기계 그만 만지게? 마치 예부터 퍽이나 신경 써준 마냥 묻는다. 어차피 잘 시간이야, 지금 영 생각 안 나면 누워서 생각해봐. 어차피 내일 모레 죽을 거라며? 아직 50시간 가까이 남았네, 하자 와그르르, 나무토막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웃음소리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약 2초 정도 걸렸다. 아무로, 12시 땡 치자마자 죽으려 할 수도 있어? 어째서 50시간이라 생각하지? 고작 스물여섯 시간일지도 모르는데 너무 여유롭지 않나? 물론 너야 내가 죽어도 지금처럼 살아가겠지만. 손목 부분이 한참 남는 니트는 샤아가 말하는 순간마다 슬렁슬렁 흔들린다, 가는 손목이 드러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왼쪽 손에는 손등에서부터 손목까지 이어지는 긴 상흔이 있다. 벌써 낙하한 지 2년이 흘렀음에도 전혀 얕아지지 않았으니만큼 앞으로도 그대로일 터다. 죽어서도 남을 상처다.
(후략)